[장석류의 예술로(路)] 2021.09.08
개인적으로 문화·예술 분야에서 정책연구를 통해 문제를 진단하고 그것에 대한 처방을 찾는 일들을 주로 하고 있다. 그러한 경험을 가지고 대학에서 강의를 통해 학생들을 만나고, 동료 기획인, 예술인, 행정인들과 협업하며 이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 “당신이 하는 일은 무엇에 유익한가요?”라고 묻는다면, 혹은 “문화정책은 우리 사회에 무슨 도움이 되나요, 왜 필요하지요?”라는 질문을 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멈칫거리게 된다. 힌트를 얻어보고자,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겉바속촉’ 같은 매력적인 이유가 있기를 기대했지만, ‘속빈겉멋’ 같이 느껴지는 ‘문화강국’에 이바지한다는 조직의 비전이 보일 뿐이다. 문화정책의 존재 이유가 ‘문화강국’일까?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래서 진짜 문화정책은 우리 사회에 어떤 도움이 될까.
월드컵보다 조금 더 기다리면 돌아오는 정치의 시간이 왔다. 그 어느 때보다 예고편이 재미가 없다. 출연진도 스토리도 흥미가 덜 하다. 무관심하진 않지만, 관심이 딱히 가지 않는 그 정도이다. 이 재미없는 정치의 무대에서도 문화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 정치의 시간에는 해결하고 싶은 사회적 문제와 욕구들이 분출한다. 주택문제, 세대갈등, 일자리 문제 앞에서 문화정책은 잘하고 있어서 언급이 없는 것인지, 쓸모가 약해서 무관심한 건지 존재감이 없다. 누구나 문화를 누려야 한다는 문화향유권 관점에서 공공 문화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설명은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창의적인 예술적 시도가 장려되어야 한다는 논리도 더는 설명하고 싶지 않다. 선심성이라거나 먹고 사는게 급한데 한가하게 예술을 운운하냐는 주장과 지겹게 만나야 한다. 그럴 때, 중앙정부의 문화정책은 5대째 이어져오는 정부 내내 시장에서 알아서 잘하고 있는 BTS와 기생충 등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문화산업과 한류로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설명한다. 국정의 관점에서 경제정책의 우산 아래 문화정책의 필요성을 판단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정치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풀어야 할 때, 문화는 정책과 만나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지금 많이 아프다. 멀미가 난 민주주의 위에서 불평등과 양극화 문제는 계속 커지고 있다. 정치는 흔들리고, 미디어는 그것을 부채질하며, 서로 간의 혐오와 비방으로 점철되는 사회적 갈등은 연평균 10% 이상 성장하는 것 같다. 반대로 국민들이 갖는 사회적 연대감은 매년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지만 인간과의 접촉, 인간의 온기와 다른 인간으로부터의 이해도 필요하다. 이런 사회적 갈등을 정치는 행정과 만나 어떻게 풀어주어야 할까. 문화정책은 상처 난 사회적 연대감을 지혈해줄 수 있는 효용을 가질 수 있다. 시장에서 살 수 없는 가치, 우리 사회가 지금 급하게 필요한 비매품의 재화는 무엇이 있을까. 행정은 시장에서 구하기 힘들지만 우리 사회가 필요한 것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정치와 행정이 주기 편하고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게 아닌, 사회가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감, 동료애, 이웃, 연대감 등의 가치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당신 것이에요”라는 사유재가 되기 어렵다. ‘우리’가 함께 만드는 공유재이다. 공원, 공연장, 경기장, 도서관, 축제, 광장 등의 공간은 공동체의 연대감이 함께 충족되는 “가치의 중심지”이다. 우리 사회가 좀 더 함께 갈 수 있게 하는 공공의 장소들이다. 축제를 예를 들어보자. 축제를 국민의 문화향유 관점에서 일시적 행사 차원으로 보면 예산이 아까울 수 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에 장례의 이야기를 다룬 <축제>라는 영화가 있다. 왜 축제라고 제목을 지었을까, 반어법으로 썼을까. 축제(祝祭)의 제(祭)는 제사(祭祀)의 제(祭)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축제는 서로를 확인하고, 위로하며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를 느끼고, 평소에 숨겨야 했던 나를 드러내면서 공동체가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비매품, 혼자서는 가질 수 없는 ‘우리’를 느끼는 사회적 경험이기도 하다. 파편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서로를 이어주는 공감과 경험의 공동체를 만들어준다. 정치는 문화예술의 정책적 가치를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스트레스가 많다.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 건강하지 않은 사회적 갈등과 혐오로 부풀어 올라있다. 사회가 가진 긴장의 총량이 높다 보니, 개인이 갖는 스트레스의 총량도 높아지고 자존감은 낮아지고 있다. 문화강국 BTS의 나라는 현재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높고, 평균보다는 2.1배 높다. 우울증 발생률도 36.8%로 국민의 10명 중 4명이 우울감을 느끼는 1위이다. 우리 사회의 정신건강에 빨간 불이 커졌다. 정치와 미디어는 이 불의 온도를 계속해서 높이고 있다.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분야가 정책과 만났을 때, 사회적 스트레스와 긴장을 완화 시키고, 삶의 회복력을 촉진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국정의 관점에서 주요한 경제지표만큼, 우리 사회의 우울감의 총량도 낮춰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왜 GDP의 상승만큼 자살률은 떨어지지 않을까. 휴식, 여유, 여가를 넘어 1인 가구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시대에 서로의 안녕을 묻고 위로할 수 있는 국민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경험을 정책이 줄 수 있어야 한다. 공원, 공연장, 경기장, 도서관, 축제, 광장 등의 공간을 공동체의 사회적 스트레스를 낮춰주고, 삶을 회복하는 “가치의 중심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문화정책은 우리 사회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오랫동안 복지관점의 문화향유와 문화산업진흥으로 문화정책의 존재이유를 설명해왔다. 우리 사회는 지금 공동체의 연대와 사회적 치유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정치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택정책과 경제정책에만 집중한다고, 공동체의 연대감이 높아지고 자살률과 사회적 우울감이 낮아지지 않는다. 교육정책은 입시에 발목이 잡혀 있고, 복지정책은 퍼주기가 아니냐는 논란에 붙잡혀 있다. 이 지점에서 문화정책이 우리 사회에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지점은 예술인들보다, 행정인과 정치인들이 알아채야 할 것이다. 국민의 마음이 건강해야 먹고 살 수 있는 힘도 낼 수 있다.
(출처)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