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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석류 Oct 13. 2021

예술인, 행정인, 기획인 부족의 언어와 기질 차이

[장석류의 예술로(路)] 2021.10.13

공공극장 혹은 문화재단에는 예술인, 기획인, 행정인 부족이 함께 모여 살고 있다. 위·촉·오 삼국지처럼 나뉘어 부족 간 서로 다른 기질적, 언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른 나라 문화를 이해하려면 언어를 배우는게 가장 빠른 것처럼, 상대를 알려면 다른 부족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세 개의 부족은 한국어라는 공통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서로 다른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다. 행정인 부족의 언어는 공문, 기안, 예산서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세부적으로 일반현황, 사업목적, 추진체계, 기대효과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예술인 부족의 언어는 대본, 악보, 콘티, ○○디자인(안)이라는 이름 등이 붙어 있고, 세부적으로 캐릭터, 플롯, 오디션, 연습 일정, 인물의 감정 같은 단어를 즐겨 쓴다.


행정인 부족에게 예술인 부족의 핵심 대본이나 악보가 유출되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했음. 지원. 확대. 도입. 조성’ 등으로 끝나는 개조식에 익숙한 행정인 부족의 언어 해독 능력으로는 아무리 쳐다봐도 이것은 대본이고, 악보라는 것 외에 추가적인 독해가 어렵다. 예술인 부족 출신인데, 행정인 부족으로 전입해 간 사람의 경우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뼛속까지 행정인 부족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의 언어 렌즈로는 대본 안에 담겨 있는 인물의 마음이 잘 읽히지 않는다. 종종 예술인 부족 중에 무용인의 경우는 대본도 없이 동작으로만 서로 소통을 하는데, 행정인 부족은 옆에서 아무리 쳐다봐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반대로 예술인 부족에게 행정인의 문서가 유출되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기본적으로 예술인 부족은 행정인 부족의 언어를 한자어로 가득 찬 옛날 문서처럼 지루해한다. 표지만 봐도, 가슴이 답답하고, 몇 장 넘기다가 이내 바로 마지막 페이지로 간다. 예술인이 행정인 부족 마을 사무실에 와서, 담당 행정인이 빈 칸이 있는 행정문서에 뭔가를 작성해달라고 하면, 예술인은 행정인에게 눈빛으로 말한다. ‘나한테 왜 이러시는거에요.’ 친절한 행정씨라면, 머뭇거리는 예술인에게 ‘뭐가 어려우세요, 뭘 도와드릴까요’라고 묻지만 어떤 행정님은 이 쉬운걸 왜 어려워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행정님에게는 베토벤 교향곡 운명이나 햄릿의 희곡을 한번 베껴오라 하고 싶다.


기획인 부족은 상인의 감각을 갖고 있다. 돈을 직접 쥐고 있는 것도 아니고,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제 2부족어를 어느 정도 구사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선’을 잘 지키며 행정인 부족으로부터 예산과 지원을 받아낼 수 있어야 하고, 예술인 부족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선’을 또 잘 지켜야 한다. 그래서 기획인 부족은 전통적으로 참을성이 많고, 줄타기를 잘하는 편이다. 기획인의 언어는 사업계획서, 작품기획서, 홍보마케팅 계획안이라는 이름 등이 붙어 있고, 사업목적, 목표 고객, 세부일정, 지출계획과 같은 단어들을 즐겨 쓴다.


부족별로 예민하게 느끼는 문장 세포들이 있다. 행정인 부족이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문장 세포는 “예산이 가능한가”, “규정에 맞는가”, “상위 조직을 설득할 수 있을까”, “감사를 받았을 때, 뒤탈이 없을까”를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규정과 예산에 맞지 않으면, ‘오징어 게임’ 대본이 눈앞에 있어도 과감하게 쓰레기통에 들어간다. 책임소재를 피하고자 하는 방어기제가 발달해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빗장 수비가 강한 특징이 있고, 좋은 공격수보다는 힘 좋은 수비수가 부족 내에서도 장수하는 편이다.


예술인 부족은 전통적으로 자존심이 강하고, 쪽팔린걸 싫어한다. 예술인 부족의 뇌에서 활발하게 작동하는 문장 세포는 “작품을 어떻게 만들까”, “연습은 어떻게 할까”, “어떻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를 예민하게 살핀다. 부족의 기질상 수비가 약하고, 아름다움을 쫓으며 세 골을 잃어도 다섯골을 넣겠다는 닥치고 공격을 선호한다. 예술인 부족은 전통적으로 대형 공격수는 종종 나오지만 괜찮은 수비수는 잘 찾기가 어렵고, 다른 부족에 비해 개인기는 뛰어나지만, 부족 내 조직력이 약한 편이다.


유리한 지정학적 위치에 비옥한 토양에서 살고 있는 행정인 부족과 아름다운 사람이 많고, 명성이 높은 예술인 부족 사이에 껴서 기획인 부족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은근과 끈기를 가진 사람이 많다. 기획인 부족은 확실하게 손에 쥔 것이 적다 보니,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성향도 강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도 관심이 많다. 이런 환경 속에서 전통적으로 좋은 플레이메이커나 미드필더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또한 예술인 부족에서 이민 온 사람들도 많고, 행정 언어를 탄력적으로 잘 구사하는 사람도 많아 상대적으로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렇게 다른 부족 간 언어와 기질은 차이가 있다.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의 언어와 감각 세포를 존중할 때, 서로 간 많은 오해는 이해로 바뀔 수 있다. 우리는 서로 필요하다. 공격수도 미드필더도 수비수도 긴밀하게


[장석류의 예술로(路)] 예술인, 행정인, 기획인 부족의 언어와 기질 차이 - 서울문화투데이 (s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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