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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하 Aug 10. 2020

자기 착취를  숭배하는 사회

부자나라 국민으로 태어나 생존의 문제를 마주한 청년들

우리는 과연 언제쯤 게임의 룰이 잘못됐다고, 아니 게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인정하게 될까.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싶다.

성공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요인들 중에 노력이 정확히 얼마만큼의 지분을 차지하는지는 모르겠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요인들의 수가 10개가 넘으니, 동일한 지분을 가정하면 노력이 성공에 미치는 영향은 10%가 채 못 되지만, 분명 그것보다는 클 거라고 성공에는 노력이 절대적일 거라고 믿고 싶다. 1만 시간 성공의 법칙이니 그릿이니 개인의 성공에는 노력이 절대적이라고 권유하는 의견들을 믿고 싶다.


할 수 있는 것이 노력밖에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재능도, 배경도 타고나지 못한 경우에는 더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는 타고난 재능을 바꿀 수도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행운에 기댈 수도 없다. 나고자란 성장배경, 가정의 경제력, 부모의 학력도 바꿀 수 없다. 태어나 마주치게 된 시대상, 경제 상황도 바꿀 수 없다. 나와 무관하게 결정되는 대학의 입학요강과 정원, 목표 기업의 인재상과 고용인원, 해당분야에 이미 진입해 있는 경쟁자 수와 소비자들의 선호도 바꿀 수 없다.


성공해서 살아남는 길은 어떻게 됐든 조금이라도 착취하는 길뿐인 것 같 서글프다.

인류의 조상들이 돌멩이 하나 손에 쥐고 사냥하고 채집하면서 생존했던 때로부터 수만 년이 흘렀는데, 우리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손에 쥘 수 있는 무기가 고작 노력 하나뿐이다. 우리 인류는 국가와 사회, 과학과 경제 분야에서는 발전을 거듭해 왔고, 보건, 교육, 연금 등 측면의 사회정책을 통해 개개인의 삶의 조건을 개선시켜왔다. 그런데 왜 아직도 우리 손에는 노력 말고는 휘두를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걸까.


우리 부모세대가 어린 시절 직면했던 생존의 문제가 반세기가 흐른 지금 다시 우리 눈 앞에 나타났다.

우리 조부모, 부모 세대의 어린 시절에는 삼시 세 끼도 못 먹는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의 삶의 목적은 생존 그 자체였다. 경제성장기를 지나면서 실업률과 빈곤율은 빠르게 감소했고, 국민소득 만 달러, 이만 달러 시대를 지나 이제는 먹고살만해진 것 같았다. 국민소득 삼만 달러 시대, 이제는 한국을 선진국이라고 칭하는 시대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부모가 저개발 후진국에서 마주했던 생존의 문제를 반세기에 걸친 기적적인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시대를 지나 고소득 선진국 반열에 오른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다시금 마주하고 있다.


우리 부모세대와 우리는 본질적으로 같은 교육을 받았다.

교과목과 입시정책, 학과의 다양성 등에서 차이가 있더라도, 극도의 경쟁과 그 속에서 승리하기 위한 자기 착취라는 우리 교육시스템을 지배하는 원리는 같았다. 타인과 사회와 거리를 두고, 스스로에게만 몰두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진 정서적 필요와 사회성을 박탈하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배웠다. 고대의 조상들은 사냥과 채집을 마치면 함께 둘러앉아 노래 부르고 벽화를 그리고, 타인과 어울리며 인간 종이 가진 사회적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켰다는데, 수만 년이 흐른 지금 우리들은 성공할 때까지 언제까지고 하루 종일 의자와 책상 사이에 끼인 채 스스로를 착취하면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진 본능들을 외면해야 한다.


우리의 부모와 조부모 세대도 다 그렇게 컸다. 다른 길은 몰랐고, 알아볼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이 나라가 이룩한 기적적인 경제발전은 인간 본능에 반하는 끝없는 자기 착취와 낙오자들의 비명으로 가득한 축산농장식 교육제도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포장했다. 패배하고 낙오된 책임은 온전히 개인에게 돌렸다. 믿을 건 자기 자신밖에 없다. 아무도 널 챙겨주지 않는다. 인간관계는 성공하면 따라오게 되어있다고 배워왔다.


GDP가 성장하는 만큼, 자살률은 치솟았고, 출산율은 쪼그라들었다.    


자기 착취에 대한 교육은 기억도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다.

돌잡이 때부터 판사봉이나 청진기처럼 사회적 성공을 상징하는 물건을 고르길 바라고, 부모로서 그렇게 교육시킬 것을 다짐하는 의식을 행한다. 어떻게 자기에게 더 효율적으로 채찍질을 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노력에 방해가 되는 본능과 기본적인 욕구들을 억누르도록 교육받는다. '우정이 밥 먹여 주냐. 공부하기도 바쁜데 연애가 웬 말이냐. 사회가 정한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여라.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라. 너에게 다른 길은 없다'라고 강요받았다. 그렇게 강요받은 숙명성은 우리의 본능과 대립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도 밥벌이조차 하기 힘들다.

여지까지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노력해왔는데도 먹고살기 위해 취업하는 것부터가 너무 힘에 부친다. 스펙 쌓기에 들이는 시간 때문에 사회 진출 연령대는 점점 올라가고, 줄어든 일자리에 청년실업률은 높아져만 간다. 이미 어려웠는데 코로나 19와 세계경제 불황으로 점점 더 살기 팍팍해진다. 더 좁아진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사력을 다해 스스로를 욱여넣어야 한다. 그래 당장은 그렇게 해서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겠지.   


이제는 선진국이라는데 세계의 모범이라는데 이 나라 국민인 나는 왜 이다지도 힘든 걸까.

해를 거듭할수록 더 효율적인 자기 착취의 논리와 기술이 등장했다. 그 결과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그들의 부모세대는 물론이고, 누나형 세대보다 더 많고 더 화려한 스펙을 쌓아 올려왔다. 그런데 그들이 마주친 현실은 그들의 윗세대가 마주했던 그것보다 가혹하다. 일인당 GDP는 선진국 수준으로 증가했고,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위명을 드날리고, 우리 정부의 정책과 대응이 세계의 모범이 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청년 실업률은 점점 더 올라만 가고, 아예 구직 활동을 포기한 청년들은 늘어만 간다. 자살률은 수십 년째 세계 최고 수준이고, 합계출산율은 세계 꼴찌다.


교육시스템은 수십 년간 같은 물건을 공급해 왔으면서, 산업 수요에 변화가 생길 때마다 준비하라는 스펙들이 늘어간다. 4차 산업혁명기의 인재상은 타인과 협업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갖춘 인재라는데, 타인과 협력하고 소통하는 그런 교육은 평생 받아 본 기억이 없다. 오히려 타인과 소통하고 협업하고 사회적이고 정서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들은 성공에 방해가 된다고 배웠던 것 같다. 한 번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 아니 그러지 말라고 가르쳤던 것들을 시대가 변해서 다른 인재가 필요하니 그 능력을 가지고 오라니, 평생을 없이 산 능력이 하루아침에 생길 리 없다.

  

기본적인 본능과 욕구를 억압하면서 평생을 죽도록 노력해 왔는데, 마주한 것은 반복적이고 집단적인 실패다. 개인의 노력이라는 인풋을 일평생 투입시키고도 대부분 실패라는 아웃풋을 받아보고 있다면 성공에 대한 우리의 분석과 대응은 수십 년 전 경제성장기에는 적확했을지 몰라도, 현재의 변화된 사회경제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꿀 수 없다고 믿었던 태생적이고 사회구조적인 조건들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지금도 일주일에 70시간에서 100시간씩 스스로를 한계까지 쥐어짜는 데도 여전히 수많은 낙오자가 발생한다면, 적어도 사회적 측면에서 우리의 실패는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구조로 받아들였던 게임의 룰과 게임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우리는 말도 제대로 트이기 전부터  친구 사귀기보다 국영수를 먼저 배웠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에 청소년기를 갈아 넣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어떻게든 좋은 직장에 아니면 어떤 직장에라도 취업하기 위해 스펙 쌓기를 하며 평생 강박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해왔다. 미래에 내 자식들이나 내 후손들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기본적인 욕구와 본능을 거세당한 채 스스로에게 채찍질할 것을 강요받으며 살 거라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우리는 이제껏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스템을 구상해야 한다.

강박적으로 자기 착취에 매달리지 않아도 낙오시키지 않는 시스템, 혼자 고립되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상대와 협력해서 함께 이기기 위한 방법을 가르칠 시스템, 그리고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정서적 사회적 욕구를 보장해주는 시스템을 구상해야 한다. 경제산업적 필요에 따라 이리 늘리고 저리 바꿔서 결국 처음에 무슨 모양이었는지도 모를 인재상을 추구하는 것은 그만둬야 한다. 수많은 개인들의 집단적 실패를 개개인의 탓으로 돌리며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눈 돌리는 것도 그만둬야 한다. 그리고, 수만 년 전 우리 조상들이 마주했던 생존이라는 목표를 청년들에게 강요해서도, 우리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주려고 해서도 안된다.


하지만 결국 오늘도 스스로를 쥐어짠다.

인류 문명이 4차 산업혁명기에 접어들어 생명공학, 인공지능, 로봇기술, 인터넷 기술, 대체연료 등 과학기술 발전이 우리 경제를 더 성장하게 만들고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주고 받았었다. 수만 년 전 우리 조상들이 사바나의 초원에서 문자도 숫자도 없이 고작 돌멩이 하나 쥐고 생존해 나갔던 것에 비하면 믿을  없을 정도의 발전이다. 그런데, 4차 산업혁명 운운하며 인류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찬미하는 이 시대에, 결국 우리들은 우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먹고사는 문제라는 생존을 위한 기본적 조건을 갖추기 위해 오늘도 스스로를 쥐어짠다. 구조의 변화를 기다리기에는 지금 내 눈앞에 닥친 생존 문제가 너무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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