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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유리 Dec 10. 2021

썸 타는 사이


올 해만 벌써 몇 명째인지 이젠 나도 좀 헷갈린다. 이게 이 남자한테 했던 말인가? 아, 저 남자한테 했던 말인가? 기어이 오늘도 실수를 했다.


"아 맞다 맞다, 제가 그 때 한 그 수액팔이 의사 이야기 있잖아요, "

했더니 남자 왈. 그런 말씀 하신 적 없는데요?

내 기억력은 무조건 정확하다고 우기고 보는터라 '아닌데, 제가 분명 말 했는데. ' 하고 두어번 더 말을 얹어보는데 계속 아니란다.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는 중, 약 3주 전에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한테 그 말을 건네던 순간이 번뜩 그림처럼 눈 앞에 스쳤다.

다행히 이번 남자는 그런 것에 예민한 것 같지 않아서, 혹은 아직 그런 것을 가지고 누구하고 한 이야기야? 하고 물을 사이가 아니라서, 그냥 넘어갔다.


대학 졸업 직후 임용 공부를 시작하며 이 세상 앞에 뭔가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고 그런 때. 한동안 나는 연애를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고 해야하나? 뭐 이것 저것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안했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고 말하고싶다. 고등학교 때 부터 대학 졸업반 까지 남자친구가 없었던 적이 없었던 나에게 3년이라는 기간은 아주 긴 공백기였다. 연애를 안하다보니 눈만 높아져 해를 더할수록 웬만한 남자들은 성에 차지 않았고, 내 마음에 쏙 드는 남자가 나타나 나에게 절실하게 구애를 한다면 만나 줄 의향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지!


그랬던 내가 엄마를 잃고 다시 연애를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근데 내가 엄마를 잃고 깨달은 것인데, 세상에는 곰곰이 생각할 수록 답을 찾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그래서 내가 왜 연애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답을 찾지 않겠다고, 다시 생각했다.


엄마가 죽고 바로는 아니고 , 절망이나 슬픔. 상실같은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반년 정도 지났을 때 쯤인가 부터 이 세상은 그 전보다 더 아름답게 보였다. 참 이상도 하지. 그토록 잔인하다 생각했던 삶이, 어느 순간 그 이전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고 또 사랑으로 가득 찬 것만 같이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한참을 생각했다. 머릿 속에서 형체 없는 온기처럼 뭉게뭉게 퍼지기만 하다가 얼마 전 그 이유를 말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 이름도 많은 질병, 전쟁, 자기 자신과의 갈등. 이런 틈바구니에서 우리들은 정말 용하게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다. 살아남은 사람들끼리는 더욱 아끼고 보살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자기 차례를 맞이할지 모를 인생이 아닌가. 살아남은자인 우리는 채 못살고 가 버린 이웃들의 몫까지고 대신 살아주어야한다. 그래서 나는 이름 모를 이의 장례식에가서 엉엉 울어주고싶고, 3년간 살다가 이사를 나온 대방동의 내 원룸에 살고있을 얼굴도, 성별도 모르는 그 누군가가 애틋하고, 나에게 흥미의 눈빛을 반짝거리는 그 누군가가 사랑스럽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마음을 건네는 나의 친구, 나의 은인, 나의 가족들을 향한 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그들을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곱게 여기고싶다.


오늘은 나를 흥미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그 누군가와 등산을 다녀왔다. 고모가 만들어준 김밥 도시락 두 통, 할머니 먹으라고 사 둔 달다구리한 군것질 거리 몇 개를 챙기고 겨우내 먹으려고 쌓아둔 사과즙 몇 개를 더 넣었다. 45분 거리를 달려서 나를 데리러 온 그 사람의 차에 타서 등산지까지 1시간 11분을 더 달렸다. 가는 길에 물을 샀어야 했는데 가면 매점이 있다고 지금 살 필요가 없다고 말을 했다. 내가 왜 그렇게 잘 아냐면 3달 전에 만나던 남자친구랑 갔던 곳이기 때문이다.


아무튼간에 도착을 했는데 등산로 입구 매점은 무슨 가는 길에 있는 슈퍼, 주차장에 있는 특산물 판매점까지 문을 다 닫았다. 가까운 편의점을 검색해보니 30분이 걸린단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오는거다. 몇 방울 오다가 말 것 같았는데 점점 더 강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난처하고 미안했다. 애교로 풀어주고, 풀어지고 할 사이도 아니어서 괜히 내가 신고 있는 등산화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계획을 조금 바꾸어서 근처에 있는 예쁜 카페에 가자고 했다. 거긴 또 어떻게 아냐면 7월에 사귀던 남자친구랑 갔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카페로 들어가서  구경을 하며 커피를 마시는데 분명 고작   전에 왔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웠고 재밌었다. 우리는  안에서 고모가 싸준 김밥을 먹고 간식을 먹었다. 그리고    곳을 돌아다녔다. 돌아다니다가 우연치 않게 너무나 마음에 드는 동화작가님의 그림을 발견해서   샀다.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집으로 와서  작가님을 검색해 한참을 작품을 감상하고 유치원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링크를 보내주며 그림책  권을 사면 좋겠다는 추천까지 했다. 저녁을 먹고 누워서 조금 뒹굴거리다가 문득 오늘에 대해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음악을 틀어놓고 타자를 두들기는데 아빠가  방에 슬쩍 들어와본다. 연애편지 쓰냐,  방엔  냄새가 나냐  이런 농담을 하다가 다시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순간이  좋다.


오늘도 나의 마음에는 사랑이 한 줌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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