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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유리 Feb 19. 2022

죽음이 남 일 같지 않아

엄마가 죽은 뒤로 모든 죽음이 새롭다. 비로소 진짜 죽음으로 다가온다. 엄마를 보냈던 장례식장 앞을 지나다닐때면 주차장을 본다. 7월 한낮에 엄마의 시신을 실은 엠뷸런스를 타고 서울에서 이 곳 장례식장 주차장으로 오던 그 여정이 떠오른다. 주차장에 차곡차곡 주차된 차와 장례식장 복도에 켜진 불을 보면서 오늘도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떠나갔구나 하고 생각을 한다.


신규교사 연수에서 주책맞게 눈물을 한바가지 흘렸다. 한 교장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인데, 학기를 시작할 때 한 사람당 하나씩, 자기가 원하는 주제로 한 달동안 자기만의 프로젝트를 완성해오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고 한다. 많은 프로젝트가 있었지만 그 중 친구들이 뽑은 최고의 프로젝트는 '아빠에게 한 달동안 영상편지 쓰기' 프로젝트 였다고 한다. 그 학생의 아버지는 그 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돌아가셨고, 그 학생은 돌아가신 아버지께 자신의 일상을 매일매일 이야기하며 영상으로 편지를 쓴 것이었다. 분명히 자신의 눈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보고, 화장을 한 것까지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이 실감이 나지를 않아서 매일매일 아버지가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편지를 썼단다. 한 달 간 편지를 쓰면서 본인의 방식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애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엄마의 죽음 이후로 내게 모든 죽음은 역시 남 일 같지가 않았다.


때때로 엄마가 너무 보고싶어서 가만히 누워 있지도 못 할 것 같은 때가 있다. 여러번 돌아눕고 이불을 들썩여본다. 어느 날 우연히 죽음에 대해 개인적인 생각을 다룬 책을 읽게 되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의 영혼은 소멸되지 않는단다. 육신은 그저 영혼의 껍데기일 뿐이라서 낡고 병들어 결국에는 사라지는 것이 이치라는 것이다. 그렇게 영혼의 옷가지가 낡아 사라지면 영혼은 다시 새 옷을 입는다. 이 말은 내게 위로가 되었고 엄마의 죽음을 애도하고 받아들이는 나만의 어떤 의식이 되었다. 눈을 감고 상상을 한다. 엄마의 영혼은 몇번째 옷가지였을지 모르는 그 육체를 벗어던지고 어디에선가 자유로이 날아다니고 있을것이라는 상상을. 그러면 좀 슬픔이 덜어진다.


그렇게 육체는 낡은 옷가지일 뿐이라며 덤덤히 받아들이려 해도 엄마의 마지막 심장소리 같은 것이 떠오르면 슬프다. 무심코 내뱉은 말에서 내가 쓰는 단어, 말투가 엄마와 비슷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챌 때는 기분이 이상하다. 거울을 보는데 어딘가 엄마 모습이 겹쳐 보이면 울어야할지 웃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내 얼굴을 똑바로 못 보겠는 그런 때가 있다. 이것도 다 하나의 찰나,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애도하는 나만의 방식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거의 매일 밤 엄마 꿈을 꾼다. 이제는 좀 그만 꾸고 싶은데 말이다. 꿈 속에서 나는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는 지금 어디에 있어? 죽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있어? 매일 날 보고 있는거야? 엄마 이제 아프지 않은거야? 이런 질문을 하면 엄마는 대답을 한다. 엄마는 널 보고 있어. 엄마의 시간은 잠깐 멈춰있어. 멀지 않은 어딘가에 있어. 엄마는 이제 아프지 않아.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죽는것이라지만, 인생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는 것이라지만. 때때로 몸서리치게 엄마가 그리울 때가 있다. 다시 눈을 감고 떠올린다. 구름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엄마의 영혼을. 아 ~ 인생은 참 달고 쓰고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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