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우장 한 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다. 투우사와 싸우다가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그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은다. 기운을 되찾아 계속 싸우기 위해서다. 소만 아는 그 자리를 스페인어로 '퀘렌시아'라고 부른다.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이다.(중략) 퀘렌시아는 회복의 장소이다.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힘들고 지쳤을 때 기운을 얻는 곳, 본연의 자기 자신에 가장 가까워지는 곳이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엄마에 대해 글로 쓰는 일이 나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한 편 한 편 그 양이 다를 뿐, 눈물과 콧물을 엮어 문장을 만든다. 한번은 내 글을 읽고 친구가 말했다. 너의 글은 정말 담담해. 그래서 더 슬퍼. 나는 내 글이 담담하게 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았다. 마음 속으로 굽이굽이 파도를 타면서 쓴 글인데, 그게 담담해보일수도 있구나.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한 편 한 편 글을 쓸 때 마다 눈물을 뽑고 파도를 타는데도 내가 계속 글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퀘렌시아라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퀘렌시아는 어떤 장소가 될 수도, 행위가 될 수도,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내 삶 속에서 나를 쉬게 하며 나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 해 보았다. 나에게는 꽤 여러가지 퀘렌시아가 있었는데 그것들을 나열해놓고 보니 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혹은 엄마와 함께 했던 것들. 엄마가 죽기 전 나의 퀘렌시아는 주로 우리가 함께 좋아했던 것들이라면 요즘은 주로 엄마가 했던 것들을 내가 따라서 하는 것만 같은 퀘렌시아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엄마의 흔적을 따라하는 것 자체로 퀘렌시아가 되는 것이다.
요즘 나는 수영에 완전히 빠져있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던 운동 수영과 등산, 내가 꼭 빼닮았다. 일주일에 5번 강습을 받고 일주일에 7번 수영을 하러 간다. 나름의 거금을 내고 소수정예 레슨도 받는다.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서 꾸역꾸역 수영을 가는 내 모습을 보며 나는 엄마를 닮고 싶어서 수영에 이다지도 열심히인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 속에 들어가 소리와 차단될 때, 그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갈 때 나는 빠짐없이 엄마를 생각한다.
엄마는 늘 나에게 기타를 배워보라고 했다. 여행을 다니면서 연주하기에 기타가 최고라면서. 그리고 길거리 연주로 돈을 벌어서 여행 경비에 보태자고 했다. 나는 늘 알겠다고 답했지만 늘 미뤄왔다. 엄마가 죽고 그 해 9월엔가, 문득 기타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용 공부도 못하겠어서 잠시 공부를 접을 동안, 슬플 때 마다 기타를 쳐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 길로 당근마켓에서 10만원을 주고 낡은 기타를 한 대 사서 낮이고 밤이고 쳤다. 지금은 월급의 반 정도가 되는 기타를 샀다. 무슨 곡이든 제법 흉내는 낼 줄 안다. 연주 방법은 같고 소리내는 방식이 다른 베이스, 일렉기타에도 손을 뻗어볼 수 있게 되었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는 내 모습을 볼 때면 문득 엄마 생각이 난다. 2020년 9월. 그 땐 이게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지금은 나의 안식처가 된 기타, 또 다른 나의 퀘렌시아.
이번 달 말에 몽골에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엄마는 여행을 정말 좋아했다. 여권에 도장찍는 페이지를 다 써서 재발급을 받을 정도로 말이다. 엄마 말로는, 여행은 낯섦을 돈 주고 사는 행위라고 했다. 편의점에서 물 한병만 사도 내 자신이 기특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왜 하필 몽골이냐고 주변에서 물어보면 나는 답했다. 나는 조금 힘든게 좋아. 거칠고 낯선것을 두려워하지 않고싶다. 사는 재미는 그런 것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당분간은 통장 잔고가 바닥날 때 까지 그 돈을 두려움과 낯섦에 투자하고싶다. 내가 여행을 좋아해서인지, 엄마가 여행을 좋아해서인지 그 이유를 명확히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아무튼 여행은 나의 빼 놓을 수 없는 퀘렌시아.
늘 단단해보이지만 가끔은 혼자인 밤이 싫을 때가 있다.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술김에 훌쩍거리고 싶을 때가 있고, 아무것도 아닌 누군가의 말에 혼자 끙끙 앓을 때가 있다. 나는 자꾸만 엄마가 했던 모든 것을 하고싶다. 엄마는 나의 피난처, 안식처, 퀘렌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