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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유리 Jul 05. 2022

이럴 때 나는 어른이 된 것 같아


1. 귀찮아서 택배 박스를 열어보는 것을 미룰 때


  택배 오기만을 기다리며 학교에서, 독서실에서 집중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를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현관에 놓인 택배 박스를 열어보기 귀찮아서 이틀이고 사흘이고 그냥 내버려두는 날들이 있다. 한 날 내 수업을 듣는 애가 이따 오후에 조퇴를 한다길래 어디 아프냐 물었더니 이따 집에 200만원짜리 전자드럼이 배송 오기로 했단다. 그게 기다려져서 학교에서의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그 기분을 나는 안다. 그래서 와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내가 경력이 2년차만 됐어도 그 애를 꾸짖었을까? 아니면 그 애가 나에게 조퇴하는 이유를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무엇인가를 숨막히게 기다리고, 기대하는 그 모습은 분명히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 모든 일에 감흥이 떨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참을성과 기다림이라고는 모르는 난데.. 택배 박스를 까지 않고 현관에 내버려두는 나의 모습은 아직 조금 낯설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는건가? 생각을 한다.



2. 운전석에 앉아 이화령 터널을 지날 때


  작년도 아니지,  겨울. 그러니까 반년도 안된 이야기라는게  안믿긴다.  1월만 해도  임고생 신분이었다. 당시에 스터디를 하면서 만났던 남자친구  조수석에 타서 자주 이화령 터널로 드라이브를 갔다. (물론 지금은 헤어진지 오래다.)  처음 이화령으로 가던 날에 우리는 아무 사이가 아니었다. 동생이 추천해준 드라이브 코스가 있다면서 이화령 이야기를 꺼냈을 , 네비에 찍힌 거리를 보고 멀어서 오히려 좋다고 했던 그런 때가 있었는데 말이지..

  이제 나는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에 앉아서 이화령 터널을 지난다. 안성에서 괴산을 지나 문경으로 내려올 , 이화령 터널을 기점으로 괴산과 문경이 나뉘고,  터널을 지나면 비로소 집에    같은 느낌이 든다. 장거리 운전에 슬슬 지쳐 허리가 뻐근해질    터널을 지나고 있자면 정말 어른이   같다.



3. 아빠가 나한테 뭐 사달라고 할 때


  아빠가 사달라고 하는 것들은 주로 정해져 있다. 서예용 붓, 구두, 런닝용 신발 정도. 여러개 두고 번갈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사서 주야장천 쓰기 때문에 쓰던게 다 떨어지면 새로 사달라고 한다. 난 여태껏 변변한 직업이 없었으니 주로 성이한테 사달라고 했고, 성이는 툴툴거리긴 해도 매번 제일 좋은 것을 사줬다.

  이번 여름에 아빠가 나에게 여름 구두를 한켤레 사달라고 했다. 24살때 전국노래자랑에 나가서 받은 상금으로 금강제화에서 꽤나 좋은 겨울 구두를  켤레 사줬었는데, 여름 구두도 내가 사줄  있어서 기쁜 마음이 들었다. 아빠는 비싼  필요 없다고 했지만  비싼게 사고싶었다. 조금 무리를 해서 겨울 구두 가격쯤 되는 여름 구두를 사서 집으로 보냈다. 성이한테 앓는 소리를 해서  정도 되는 돈을 받았지만 여전히  통장엔 타격이 있다. 생각보다 교사 월급이 매우 짜기 때문에... 그래도 마음은 좋다. 드디어 아빠에게 구두를 사줄  있다니!



4. 벌초대행이 얼마인지 알고있을 때

  여름 한 철이 지나면 무더위 속에서 무섭게 자라온 풀들을 베는 벌초 철이 다가온다. 뜬금없이 성이가 다음번에 외할아버지댁에 가면 벌초대행 값이 꽤나 비싸다며 현금을 좀 드리자고 했다. 지난번 벌초 때 외할아버지께서 벌초대행을 통해서 산소를 다 정리 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벌초대행이 비싸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그 값을 직접 치르게 된 나는, 이제 피할 수 없이 어른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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