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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유리 Nov 20. 2022

답지가 사라진 문제집

나만이 나를 무한히 긍정할 수 있지

  불안한 연애에 요 며칠 마음의 이삿짐을 쌌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한다. 나는 왜 불안을 사랑하는 것일까? 지겹게 싸우고 상처주고 화해하고를 반복하는 관계임에도 놓기가 싫다. 마음의 이삿짐을 바리바리 챙겨 언제라도 이 사랑을 떠날 준비를 하다가도, 한 번 사는 인생 나는 솔로 9기 영숙처럼 내 마음이 닳아 없어질 때 까지 써봐야 하는 것 아닌가? 다짐 하는, 냉탕과 온탕의 반복. 이제는 성숙한 관계를 맺을 때도 되지 않았나,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자체도 유치하고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지지만, 모르겠다. 꼭 아름답고 교훈적인 이야기만 쓸 필요는 없으니까. 금방 휘발되어버릴 이 불안의 순간을 나는 글로 남겨보고 싶기도 하다. 이 순간 또한 귀여운 추억이 될 것이니 말이다.

  음식도 자극적인 것이 자꾸 생각 나듯이 만남도 그런가보다. 먹고 나면 배 아플 걸 뻔히 아는데 엽기 떡볶이를 포기하지 못 하는 것 처럼, 내가 불안을 사랑하는 이유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을 해본다. 아직은 젊은 패기와 넘치는 체력에 나를 휘몰아치는 불안에 내어놓고싶어 하는, 약간은 변태적 성향이 있는 것도 같다.


  문득 엄마가 보고싶어졌다. 나는 하등 먹고 사는 데는 도움이 안되는 그런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주로 엄마와 그런 대화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렇게 연애 고민이 생기면 엄마에게 하루 웬 종일 그런 질문들을 해댔다. 질문에는 주제도 두서도 없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연속이었다. 엄마, 나는 왜 이럴까? 나를 싫어하면 더 좋아지고 나를 좋다고 하면 흥미가 안생겨. 나 진짜 성격 이상하지? 영영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걸까? 그러면 엄마는 진지하게 함께 고민해줬다. 아주 다방면으로 나를 샅샅이 파헤쳐준다.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 분석해주는 '나'를 감상하는 것은 정말 재미 있었고, 듣다 보면 마음이 평온해졌다. 드론으로 저 위에서 나를 내려다 보는 기분이랄까? 이야기가 한 번 시작되면 목이 건조해 쩍쩍 갈라질 때 까지 계속된다. 그 때의 나는 지금보다 어렸기에 때때로 다음 날이 되면 완전히 리셋되어 처음부터 다시 그런 고민들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그랬다. 엄마는 나에게 늘 해답같은 역할이었다.


  다시 돌아와 불안에 대해 생각 하던 중 나는 이제 나는 정말 혼자가 되었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누가 나와 함께 고뇌해줄까? 나 밖에 없다. 누가 나를 무한히 긍정해 줄까? 그것도 나 뿐이다. 오롯이 나만이 나를 무한히, 이 세상이 끝날 때 까지 긍정해 줄 수 있구나. 그래 률아, 네가 불안을 사랑한다 해도, 스스로 불구덩이에 들어간다 해도, 너의 마음이 닳아 없어질 때 까지 네 자신을 깎아 없앤다 해도 나만이 너를 긍정할 수 있겠구나.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나는 스스로 어찌저찌 해답을 찾은 걸까? 아까보다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엄마의 부재는 나에게 영원한 숙제를 남겼다. 스스로를 오롯이 짊어지는 것. 답지가 사라진 문제집을 열심히 혼자 힘으로 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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