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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miverse Feb 28. 2021

P23-119를 부를 때의 마음과 현실

마음은 다급한데, 현실은 안그랬다

저녁즈음, 동네 마트에 산책 겸 길을 나섰다. 주말 내내 휴식을 취하다가, 잠시 동네의 산책. 과일이 먹고 싶어 뭔가 과일을 살 예정이었고, 골뱅이 비빔면을 위해 진비빔면을 살 예정.




원래 쇼핑은 예상 대비 2~3배는 기본 아닙니까(...)


이것저것 사들고, 마트를 나섰다. 봉투도 따로 안들고 주머니에 우겨넣고 손에 차곡차곡 쌓아 들고 룰루랄라 신나게 집에가려고 하던 길. 


원체 마트 앞은 사람이 많은 길이다. 차가 많이 다니는 곳인데다가, 워낙에 유명한 '명물거리'가 근처에 있어 외부인들이 많이 찾아 오는 곳이며, 술에 취한 사람도 제법 많은 길이다. 게다가 중국인들과 조선족분들이 많아 가끔 중국 노래 버스킹을 한다거나 중국어로 대화하며 걷는 사람들도 많은 동네. 


마트를 나와 집쪽으로 걸어가는데, 앞쪽에서 어떤 나이드신 분 한 분이 내 쪽으로 비척비척 걸어오고 계셨다. 흔히 있는 풍경이라 반 걸음 정도 옆으로 비켜서는데, 같은 방향으로 오던(=나를 향해 오던) 자전거 앞 쪽으로 갑자기 갈지자 걸음. 자전거를 타고 계신 아주머니는 긴급하게 방향을 틀었는데, 오히려 그 타이어에 걸려 비척비척 걸어오시던 한 분이 그대로 고꾸라지셨다. 마치 동상이 무너지듯이, 바로 앞으로. 그리고 약간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보고 계셨기 때문에 머리쪽으로. 


화들짝 놀랐지만 넘어지신 분은 넘어진 그대로 미동도 없으셨다. 주변의 적막. 정말, 1~2초간의 '시간정지'가 찾아온 것 같은 느낌.


그 시간정지가 풀리자마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자전거 타신 분과 주변의 다른 분이 갑자기 그 분께 달려 들었고, 주변의 오토바이, 자전거, 차, 그리고 사람까지 모두 멈췄다. 부축을 받아 상체를 일으키신 그 분의 자리에는 흥건한 피.


인생을 살면서, 선지와 같은 어떤 목적성으로 보는 것이 아닌, '남의 피가 흥건한 우연한 상황'을 볼 일이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본 나의 피는 검붉은 피였는데, 검회색의 아스팔트에 대비된 그 자리의 피는 너무나 선홍색이었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뉴스든지, 이렇게 갑자기 길에서 사람이 쓰러지면 주변 사람들이 달려드는 그런 모습이 종종 비춰지긴하는데, 현실은 달랐다. 일단 그 자전거를 타고 계셨던 아주머니와 다른 남자 분이 부축을 하고, 옆에 상자를 치우고 계시던 할머니가 뭐라고 뭐라고 말씀하시는 정도. 나조차도 머릿속으로는 '부축을 해드려야하는데...?'라는 생각만 떠오르고,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무엇보다 양 손에 쇼핑한 짐들이.


물론 이런 상황에 대비한 교육은 많이 받는다. (상황에 따라 약간씩은 다르지만) 먼저 특정 사람을 지정해서 119 신고를 요청하고, 그 다음에 응급조치를 진행한다는 그런 내용. 하지만 이렇게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상황이라니. 당황에 혼란에, 부축하려면 손에 들고 있는 짐을 어떻하지? 119에 신고를 해야하는데? 라는 생각만 빠르게 오가고 있었다. 잠시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다가 둘러보니 다들 당황에 혼란이라는 같은 상황인지 모두 머뭇머뭇.


일단 뭔가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함께 마트를 간 친구에게 짐 일부와 아이폰을 건네 119 신고를 요청했다. (아마 이 친구가 없었다면, 혼란과 당황에 119 신고를 요청도 못했을지도) 친구도 짐을 좀 들고 있는터라, 일부 짐은 일단 아무데나 내려놓고 부축을 해드렸다. 자세 자체가 땅을 보고 누워 계신 상태에서 상체만 들린 상태라 어서 일으켜 앉혀드려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길 한가운데라 (차는 못지나가는 상황이었지만) 위험해.


부축을 해보니 우려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머리부터 떨어져 부딪혀서 눈 부근이 찢어진 상태. 이제서야 누군가 두루마리 휴지를 가져와서 넘어지신 분에게 쥐어드려 피를 닦도록 했고, 자전거 타고 계시던 아주머니를 대체해서 길가에 일단 앉혀드렸다. 너무 급하게 아이폰을 전해줘서 잠금해제도 못했는데, 다행히 친구가 119 신고는 해둔 상태였다.


팁 : 아이폰은 잠금해제가 안되었어도 비번 입력창에서 왼쪽 아래"긴급상황"를 누르면 긴급전화를 쓸 수 있다. 긴급전화 상태서 다시 왼쪽 아래의 "의료정보"를 누르면 아이폰 사용자가 등록한 본인 정보(이름, 생년월일, 혈액형, 신장, 몸무게)와 긴급 연락처로 등록한 사람들의 연락처가 뜨게 되어있는데, 본인정보와 긴급 연락처는 사용자가 공개 여부를 설정할 수 있다. 참고로 유심이 없어도, 긴급 통화는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알아두면 좋을 팁(?) '의료 정보'는 등록해두는게 좋지 않겠어용? '건강' 앱을 봅시다!




이제서야 주위가 좀 더 보였다. 오가는 차가 완전히 막혀있었고, 20~30명의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누군가 가져다 준 두루마리 휴지를 벌써 다쓴 모양. 이제서야 지금까지 배웠던 내용들이 다시 생각나서, 마트에서 나오신 분과 눈을 마주치며 휴지를 달라고 말씀드렸더니 한 움큼 냅킨을 주셔서 피를 닦으실 수 있도록 전달해드렸다.


좋은 세상이다(!)


경찰차가 지나가다 이런 모습을 발견하고 다가와서 상세한 설명을 해주고, 마침 이어 구급대원 분들도 도착해서 상황을 말씀드린 뒤 나도 다시 주섬주섬 바닥에 내려놓은 짐을 챙겨 자릴 떴다. 아니 근데 자전거타고 어시다 원인을 제공한 아주머니는 어디로 가신거지




세상일이라는 것이 단순히 '교육'만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온갖 안전 교육과 이런 상황에 대비한 안내를 그렇게 받아도, 실상황이 오니 순간적으로 멈췄던 두뇌,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몸. 뉴스에서 보이는 '미담' 얘기를 보면 '나도 저 상황이었다면 나서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현실은 All Stop. 마음은 정말 급한데, 현실이 그렇지가 못하다. 


한편으로는, 이런 일이 생기면 정말 앞뒤 안가리고 달려들어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평소 이런 문제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지-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도록 멈춰버리는 현실이라니. 그런데 이걸 이겨내고 바로 달려가시는 사람들이라니. 다시 한번, 세상에 도움을 주시는 많은 분들께 박수를-


아, 참고로, 넘어지셨던 분은 술을 많이 드셔서 그런 것으로. 마침 부축을 돕는 다른 분이 보호자 역할을 해주실 수 있는 분이라 자세한 뒷처리까지 보진 못했는데, 부축해서 앉혀드린 이후에는 정신도 좀 돌아오신 듯 했다. 넘어지신 분과 부축해주신 분 모두 한국분이 아니셨나, 혹은 조선족분이셨나, 뭔가 말이 통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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