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세탁기를 두고 그 집을 떠났다
신혼 때, 우리는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햇살이 예쁘게 들어오는 멋진 아파트를 보게 되었다.
“우리도 언젠가 저기 살자.”
그 말은 막연한 희망이었지만,
우리 부부는 그날 이후 종종 그 아파트를 지나다닐 때면
같은 말을 반복하곤 했다.
“우리 저기 살면 정말 좋겠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진짜로 그 집을 샀다.
결혼 몇 년 후, 모아둔 돈으로
드디어 그 아파트를 소유하게 되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돈이 부족해서, 우리는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몇 년 동안 전세를 주었다.
집은 내 이름으로 되어 있었지만,
살고 있는 건 언제나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우리는 결심했다.
“이젠 우리도 살아보자, 그 집에서.”
오래 미뤄둔 꿈을 꺼내
정성껏 리모델링을 했다.
벽지 하나, 조명 하나,
모든 선택에 꿈이 묻어 있었다.
드디어 그 집에 우리가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 집이 내 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모델링한 새집의 냄새가 아직 남아있던 날,
우리는 그 집을 나왔다.
회색톤의 새로운 인테리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던
신혼에 샀던 그 빨간 세탁기를 두고
그 집을 떠났다.
세탁기는 구석에 숨겨 놓았고,
그 세탁기는 그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꿈을 이뤘기에 더 슬펐다.
막 손에 잡은 행복이
눈앞에서 스르륵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 짧은 순간이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 집에 살았던 몇 주는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서 아련히 떠오른다.
나는 그때 알았다.
꿈은, 이룬다고 해서
꼭 오래 머무르는 것은 아니라는 걸.
그리고 떠남이 언제나 실패는 아니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