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가 바뀌면 사람이 바뀐다

열한 번의 새로운 사람들

by 긍정

이사를 하며 처음 접한 문화가 있다. 바로 부동산 사장님과의 눈치 싸움.

이게 참, 묘하다. 집 보러 간 건 나인데, 괜히 면접 보는 느낌이랄까.


“아이 있으세요?”

“부부 두 분이서 사세요?”

“예산은 얼마 갖고 계세요?”

질문을 받다 보면 잠시 내가 매수자인지, 을 인지 헷갈린다.


내 집에서 살고 싶다는 욕심일까 불안이었을까.

우리 가족은 이사를 전세가 아닌 매매로 했다.

이사 한 번에 적잖은 용기가 필요했다. 집을 사는 건 어찌 보면 이곳에서 살겠다는 결심 같은 거니까.


이사 초기에는 이웃과 인사 나누기에도 열정이 있었다.

지금은 안 하지만, 그때는 시루떡도 돌렸다. 정말로.

조그만 접시에 정성껏 담아 문 앞에 살짝 놔두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흐뭇했다.

그러다 어느 집에서는 답례로 퐁퐁을 받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이 동네는 떡 대신 주방세제로 말하는구나. 문화차이 같았지만, 또 그런 게 정겹기도 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으로 처음 이사했을 땐, 경비원 아저씨가 늘 조용히 1층에서 택배를 보관해 주셨다.

아저씨는 언제나 점잖고 말씀이 없으셨다. 따로 말을 많이 나누진 않았지만, 퇴근하고 1층 경비실 문을 살짝 열어 안녕하세요, 택배 찾으러 왔어요 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건네주시던 그 조용한 배려가 참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다음으로 간 동네는 놀이터가 참 좋았다. 그곳에선 아이 키우는 집들이 많아서, 슬쩍 눈만 마주쳐도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가 자연스러웠다. 이름도 모르고, 연락처도 모르지만, 얼굴만 보면 반가운 아는 사이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어느 동네에선 단골 카페 사장님과 인사만 주고받았다

큰 슈퍼마켓의 직원들과는 따로 말은 많이 안 나눴지만 늘 상냥한 인사로 하루를 열고 닫았다. 그런 일상이 쌓이면 그 동네가 조금 더 내 집 같아진다.


치킨가게 사장님은 아이 얼굴을 기억해 줬고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 덕분에 알게 된 사람들이 많다. 유치원, 초등학교, 학원.


매일같이 눈빛으로 인사를 나누던 학부모들, 키즈카페에서 열리던 생일 모임들, 학원 앞 대기줄에서 만난 엄마들. 처음엔 다 낯설었는데, 언젠가부터 서로 오늘 끝나고 놀이터 가세요? 물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사는 이 모든 인연을 한 번에 정리해버리곤 했다.



정든 카페, 친근한 상점들, 아이와 함께 만든 작은 인맥들. 떠나올 때마다 아쉬웠고, 어느 날엔 문득 서글펐다. 내가 익숙해질 때쯤, 떠나야 한다는 것. 관계도, 길도, 풍경도 모두 다시 시작이라는 건,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든다. 그런데 헤어짐이 아쉬움만 있는 건 아니더라.


신기하게도, 늘 새로운 인연이 나타났다.

새 동네에서도 누군가는 웃으며 길을 안내해 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처음 본 날부터 아이 이름을 기억해 줬다. 관계라는 건 그렇게 시작되더라.


그리고 분명한 건 하나 있었다.

떠난 동네에서의 인연이 모두 끊어지는 건 아니라는 것.


지금도 명절이면 안부를 나누는 학부모 친구가 있고, 이사할 때마다 찾아와서 이사 축하해 주는

한참 전에 살았던 같은 아파트 살던 주민도 있다.



장소가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


하지만 그 변화는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새로운 만남이 생기고, 예상치 못한 정이 쌓이고, 언젠가는 그 사람까지 그리워지니까.


나는 그렇게, 열한 번의 주소를 지나며

열한 번의 새로운 사람들과

열한 번의 나를 만나며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