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는 과거의 산물이며 미래의 원인

박준,「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by ryu

2022년 교양 과목 '문학이란 무엇일까'에서 제출한 비평문에 살을 더했습니다.


박준의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는 독자들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시 속으로 몰입시킨다.

해당 시집은 주로 평범한 사람인 화자의 일상과 관련된 사물이나 사건들을 주제로 가진다.

이러한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주제들은 우리의 삶과도 밀접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친근함을 느끼고 시적 상황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시에 거센소리와 된소리를 자제하는 박준의 특징과 맞물려 시를 읽을 때 편안함과 안정감을 준다.

생활과 예보

비 온다니 꽃 지겠다

진종일 마루에 앉아
라디오를 듣던 아버지가
오늘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위 시에서 화자의 아버지는 라디오에서 나온 일기예보를 듣고 오늘 처음으로 자식에게 말을 건넨다.

이는 자식에게 말을 건네고 싶지만 부끄러워서 간신히 일상적인 이야기로 말을 건네는, 과묵하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러한 모습은 단순히 화자나 시인 박준의 아버지에만 특정 되는 모습이 아니라, ‘아버지’하면 떠오르는 여러 이미지 중 하나일 것이다.

이처럼 평범한 화자의 일상을 주제로 하여 평범한 우리들이 시적 상황에 공감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박준은 시의 처음부터 이러한 일상적인 주제나 사건 혹은 자신의 생각을 던진 뒤 시를 순행적으로 이끌어 가는 구성을 주로 보인다.


삼월의 나무 (일부)

불을 피우기
미안한 저녁이
삼월에는 있다
(중략)

내가 아직 세상을
좋아하는 데에는

우리의 끝이 언제나
한 그루의 나무와
함께한다는 것에 있다
(생략)

위 시는 ‘불을 피우기 미안한 저녁’이 ‘삼월’에 있다는 서술로 시가 시작된다.

이후 시인이 이러한 생각(불을 피우기 미안한 저녁이 삼월에 있다는 생각)이 든 후에 한 행동들과 ‘불을 피우기 미안한 저녁’이 ‘삼월’에 있는 이유에 대해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시가 전개 된다.

독자는 첫 문장을 읽고 화자가 ‘삼월’에 ‘불을 피우기 미안한 저녁’이 있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이후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시에 더욱 몰입하거나 자신이 느낀 삼월의 나무를 떠올리며 공감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박준의 시는 일상적인 감정이나 사건들을 주제로 선정하고 순행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며 독자들을 시 속으로 끌어들여 깊은 공감을 하게 만든다.


순행적으로 전개 되는 것은 단순히 개별적인 시 뿐만이 아니다.

해당 시집은 각각 사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시를 4부로 나누었으며 각각의 시에는 자신이 속한 계절을 드러내는 시어들을 시 속에 삽입하여 계절감을 드러낸다.

또한 각 파트 안에서도 최대한 시간 순서에 맞게 시를 배치한 것이 눈에 띈다.

대표적으로 1부(봄)에서는 ‘삼월의 나무’ 다음에 ‘사월의 잠’을 배치하였고, 여름의 시작에는 ‘초복’이라는 시를, 2부(여름)의 끝에는 ‘처서’라는 시를 배치하여 여름의 끝을 보낸다고 서술한다.

처서 (일부)

앞집에 살던 염장이는
(중략)

죽은 사람이 입던 옷들을 가져와
지붕에 빨아 너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중략)
마루로 나와 앉은 당신과 나는
희고 붉고 검고 하던 그 옷들의 색을
눈에 넣으며 여름의 끝을 보냈다.

모든 시에 정확한 시간이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각 계절 안에서도 시간의 전후를 최대한 생각하여 배치한 것을 알 수 있다.

박준이 이처럼 순행적인 시간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숲 (일부)

(생략)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중략) 오늘은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베인다’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그 말들은 서로의 머리를 털어줄 것입니다 (생략)

박준에게 있어 시간은 과거에서부터 선형적으로 흐르는 것이며, 과거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현재까지 남아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또한 현재는 과거로부터 전해져 온 것인 동시에 미래의 입장에선 과거가 되어 미래에 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위 시에서 ‘오래전 나눈 말들’은 과거에 있던 대상임에도 ‘오늘쯤’이라는 현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화자는 미래의 과거인 현재에서 미래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여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며, 미래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상상한다.

이처럼 박준이 시의 내부 구조 뿐만 아니라 시집 전체를 통틀어서 봄,여름,가을,겨울 의 순행적 구조로 구성한 까닭은 이러한 박준의 시간에 대한 가치관을 녹이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해당 시집에서는 여러 시들에 걸쳐 동일한 단어가 등장하여 시들 간의 유기적 연결을 느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처서」에서도 등장한 ‘당신’이라는 단어가 있다.


여름의 일
–묵호 (일부)

연을 시간에 맡겨두고 허름한 날을 보낼 때의 일입니다 그 허름함 사이로 잊어야 할 것과 지워야 할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때의 일입니다 당신은 어렸고 나는 서러워서 우리가 자주 격랑을 보던 때의 일입니다 (중략) 배를 타고 나갔던 사내들이 돌아와 침과 욕과 돈을 길바닥으로 내던질 때의 일입니다 와중에도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어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던 때의 일입니다 (생략)
맑은 당신의 눈앞에, 맑은 당신의 눈빛 같은 것들이

구미로 간다 한번 가보지 않은 구미에는 군화 끝을 목에 걸고 죽은 고참이 살았고 아버지가 세 달 치 임금을 받지 못한 농공 단지가 있고 세상 끝의 맛을 낸다는 음식점들이 있다 얼마전 우연히 만난 친구도 근방 공단에 직장을 얻었다고 했다 (중략) 구미로 가는 길, 아니 어딘가로 처음 가는 길은 언제나 멀어서 나는 더 먼걸음을 하고 있을 당신의 눈을 기릴 수 있다 그런 당신의 눈앞에도 맑은 당신의 눈빛 같은 것들이 설핏 내비쳤으면 한다


위 시들은 모두 ‘당신’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그러나 위 시들의 ‘당신’이라는 존재는 동일 인물들이 아닌, 시인이 불특정한 인물을 표현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맑은 당신의 눈앞에, 맑은 당신의 눈빛 같은 것들이」에서 ‘당신’은 특정한 대상이 아닌 길을 가면서 떠오르는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고, 「여름의 일」에서 ‘당신’은 화자가 격랑이 일만큼 크게 싸우고 헤어진 후 무덤덤하게 회상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시인이 특정한 인물을 지칭하지 않고 ‘당신’이라는 정의되지 않은 대상을 시 속에서 사용한 이유는 독자들로 하여금 시적 공감을 불러오기 위해서 라고 생각한다.

‘당신’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시적 상황과 맞물려 독자들이 ‘당신’이라는 단어에 특정 인물을 대입하여 구체화 시킬 수 있다. 예를들어 「여름의 일」에서 독자는 ‘당신’에 자신이 헤어졌던 연인 대입하여 시를 읽을 수 있고, 「처서」에서 ‘당신’에 자신의 소중하고 소박한 추억을 함께한 사람을 대입하여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집에는 화자 외의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 시가 많다.

이는 마치 박준이라는 시인이 사람과의 경험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 것처럼 느껴진다.

위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당신, 「쑥국」, 「생활과 예보」 등에서는 아버지, 그리고 대상이 등장하지 않는 시에서는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른 인물의 등장은 이 시집의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더해주는 것 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박준의 시집은 일상적 소재, 순행적 구조, 보편적 상황 등을 설정하여 독자들이 편안하고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쉼터가 되어준다.

박준의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문단계의 아이돌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까닭은 힘들고 각박한 현재로부터 잠시 눈을 돌려 화자와 함께 과거를 추억하고 화자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미래를 향한 현재로 돌아갈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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