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생활과 예보
비 온다니 꽃 지겠다
진종일 마루에 앉아
라디오를 듣던 아버지가
오늘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삼월의 나무 (일부)
불을 피우기
미안한 저녁이
삼월에는 있다
(중략)
내가 아직 세상을
좋아하는 데에는
우리의 끝이 언제나
한 그루의 나무와
함께한다는 것에 있다
(생략)
처서 (일부)
앞집에 살던 염장이는
(중략)
죽은 사람이 입던 옷들을 가져와
지붕에 빨아 너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중략)
마루로 나와 앉은 당신과 나는
희고 붉고 검고 하던 그 옷들의 색을
눈에 넣으며 여름의 끝을 보냈다.
숲 (일부)
(생략)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중략) 오늘은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베인다’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그 말들은 서로의 머리를 털어줄 것입니다 (생략)
여름의 일
–묵호 (일부)
연을 시간에 맡겨두고 허름한 날을 보낼 때의 일입니다 그 허름함 사이로 잊어야 할 것과 지워야 할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때의 일입니다 당신은 어렸고 나는 서러워서 우리가 자주 격랑을 보던 때의 일입니다 (중략) 배를 타고 나갔던 사내들이 돌아와 침과 욕과 돈을 길바닥으로 내던질 때의 일입니다 와중에도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어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던 때의 일입니다 (생략)
맑은 당신의 눈앞에, 맑은 당신의 눈빛 같은 것들이
구미로 간다 한번 가보지 않은 구미에는 군화 끝을 목에 걸고 죽은 고참이 살았고 아버지가 세 달 치 임금을 받지 못한 농공 단지가 있고 세상 끝의 맛을 낸다는 음식점들이 있다 얼마전 우연히 만난 친구도 근방 공단에 직장을 얻었다고 했다 (중략) 구미로 가는 길, 아니 어딘가로 처음 가는 길은 언제나 멀어서 나는 더 먼걸음을 하고 있을 당신의 눈을 기릴 수 있다 그런 당신의 눈앞에도 맑은 당신의 눈빛 같은 것들이 설핏 내비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