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음을 굴리는 게 맞을까, 한국식 영어가 맞을까

by 류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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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로 알게 된 지인과 대화 중에 나온 이야기다.


나: ‘나는 그 정도로 early adopter는 아니어서 그 물건을 구매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지인: ‘우와 early adopter, 발음 엄청 굴리네‘


이에 관한 에피소드는 사실 정말 많다. ‘R’를 ‘알’이라고 발음하지 않고 ‘R’라고 발음해서 직장에서 놀림을 받기도 했고, 오랫동안 만난 한국 대학교 친구들과 대화할 때도 비슷한 상황 중 10번 중 2번은 놀림을 받는다.


재외국민 출신이 한국에 살면 종종 이 문제를 맞닥뜨린다.


한국에서 살면서 원래 영어인 단어들의 발음을 평상시 내가 말하는 대로 말하는 게 맞을까 아니면 한국식 영어로 말하는 게 맞을까?


우선 한국식 영어로 말하는 게 오히려 더 pretentious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원래 영어인 단어를 ‘상대방이 이걸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거야‘라고 가정을 미리 하고 일부러 한국어 발음으로 바꿔서 대화를 하는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럽다.


또 내가 말할 때 불편하다고 느낀다. 대화하며 특정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아 맞다 이거는 한국 억양으로 바꿔서 말해야지‘라고 생각하며 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할 수는 있겠지만 평생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쓰는 악센트를 변형해 가며 대화를 하면 내가 나의 과거를 부정하고,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만 같다.


한 때 인터넷에서 한 대학교 과대가 한 대학생에게 부산 사투리를 자제해달라고 말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사투리라는 것은 내가 살아온 인생의 흔적이며 증거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들, 내 악센트들은 내가 살아온 경험들을 증명해 주는, 나라는 사람이 누군지를 대변하는 것들인데 그것을 완전히 묵살시키자니 슬퍼지기 마련이다.



반대로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도 있다. 그 지역에 가면 그 지역의 로컬 발음으로 대화하는 게 상대방을 위한 배려일 수도 있다. 대화를 하는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게 무슨 낭패란 말인가. 그 지역에 물들이기 위해서는 그 지역 악센트를 빨리 배우는 것도 훌륭한 생존 법칙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렇게 ‘발음 완전 굴리네’식의 말을 듣는 경우에는 그 다음부터는 슬그머니 한국식 발음으로 바꿔 대화를 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오늘도 고민하면서 살아간다. 적당히 원래 발음을 섞어가며 나의 정체성을 지키기도 하고, 적당히 한국식 영어 발음으로 말하기도 하며, 이렇게 저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다.




“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 한 아이를 길러내기 위해서는 온 마을을 필요로 한다.” 라는 말이 있다.


가끔 나는 나를 길러낸 마을이 너무 광대해서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이 나를 가르쳐서, 근데 정작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는 생각보다 이분법적이어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너무 큰 마을에서 별의 별거를 배워와 온갖 것들로 섞여버린 나는 이분법적인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이렇게 조금씩 타협해 가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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