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0: 타인을 읽는다고 믿는 착각

올렌카와 지나이다. 두 여인을 다시 바로 보며

by Slow walker

여러 고전 소설을 읽으면서 특히나 기억에 남는 두 여성 인물이 있다. 안톤 체호프 단편 소설 '귀여운 여인'의 올렌카와 이반 투르게네프 중편소설 '첫사랑'의 지나이다. 존재감에 비해 아주 유명한 명작 소설의 등장 인물이 아니라서 그저 잠깐 소비하는 정도로 존재하고 있다.(더군다나 그들이 위인은 아니니깐) 그래서 굳이 꾸역꾸역 이 소설들의 후기를 국내외로 찾아서 사람들이 남긴 걸 찾아봤는데 올렌카는 좀 모자른 사람, 지나이다는 썅년 정도로만 소비되는 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정확히 24년 연말, 지나이다는 썅년이란 어떤 글을 보고 이 글의 첫 작성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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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 속 올렌카, 그리고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속 지나이다. 이들은 수많은 주인공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보통 올렌카는 주체성 없이 타인에게 의존하는 흐릿한 자아를 가진 사람으로, 지나이다는 보수적인 사회에서 남자들을 홀리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사람으로 정의된다.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는 듯한 이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대개 제목이 주는 정보와 화자의 시선이라는 색안경을 쓴 채 인물을 마주한다. '귀여운'과 '첫사랑'이라는 싱그러운 틀은 본질을 보기도 전에 이미 어떤 결론을 내리게 만든다. 하지만 그 색안경을 벗었을 때 우리는 제목이 주는 반전을 넘어 두 여인을 너무나 가볍게 정의해왔음을 깨닫는다.


올렌카의 일생은 타인의 인생을 곧 자신의 것으로 치환하는 과정이다. 극장주와 결혼하면 "연극은 고귀한 예술"이라 믿으며 무대가 상할까봐 비내리는 날씨를 걱정하고 목재상과 재혼하면 환경적인 걸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산림업의 고충을 읊조리며 자산 중심의 보수적인 아내로 변모한다. 수의사와 사랑에 빠졌을 땐 가축 전문가처럼 굴다가, 노년에 이르러서는 수의사의 아들을 돌보며 '엄마'라는 역할에 자신의 온 생애를 투사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지고지순하고 귀여운 사람'이라 부른다. 반면 지나이다는 마을의 남자들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굴리며 숭배받는 여왕으로 군림한다. 관찰자 블라디미르의 시선 속에서 그녀는 모두에게 친절한 듯 보이나 결코 닿을 수 없는 성벽 같은 존재다. 그녀는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들을 통제하며 자신의 자아를 확인하는 듯 보이지만 모순적이게도 본인이 가장 갈구하는 존재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권위적 인물, 즉 블라디미르의 아버지이며 그 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 결국 불륜이 들통난 뒤 마을을 떠나 결혼한 그녀는 출산 중 사망한다. 독자들은 그녀를 '여우짓을 하다 천벌을 받은 팜므파탈' 정도로 소비해버리곤 한다.


올렌카의 일대기를 자아의 결핍으로만 규정하는 건 강한 자아만이 옳다고 믿는 현대인의 편견일지 모른다. 그녀는 거창한 야망 대신 오늘을 지탱할 온기를 원했을 것이다. 본질을 모른 채 얻은 안식일지라도 그 안에서 누리는 평온을 타인이 함부로 폄하할 수는 없다. 체호프는 '귀여운 여인'이라는 반어법적 제목을 통해 마초적 시선으로 여성을 1차원적으로 판단하는 독자들에게 트릭을 걸었다. 톨스토이가 그녀를 '위대한 성녀'라 평한 것 역시 삶의 새로운 국면마다 완벽하게 녹아드는 그녀의 경이로운 생명력만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어리석음에 신경질이 나다가도 결국 제목을 다시 비틀어 그녀를 정말 '귀여운 여인'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동정이나 비판이 아닌, 그녀만의 생존 방식을 존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지나이다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소년 시절 블라디미르'라는 기억속에서만 존재되고 관음의 대상으로 소비된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최후 보루였던 그녀에게, 남자들을 거느리는 행위는 어쩌면 척박한 현실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투르게네프가 묘사하는 '첫사랑'은 순수의 붕괴와 어른 세계의 폭력을 처음 마주하는 공포를 목격하는 사건이다. 아버지가 휘두른 채찍에 맞는 지나이다의 모습은 그녀의 우상적 지위가 더 큰 권력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잔인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누군가의 첫사랑이기 이전에, 비루한 가문과 히스테릭한 어머니 사이에서 홀로 서야 했던 고독한 개인이다. 그녀의 죽음은 악녀의 최후로 보는 프레임을 걷어내면 그저 새로운 삶을 앞두고 맞이한 어처구니없는 사고였을 뿐이다.


올렌카는 비어 있음이 아닌 무한한 수용, 지나이다는 악녀가 아닌 분투하는 개인으로 한 번 더 재해석을 해보면 좋겠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창조한 인물을 바라보는 나의 편견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그저 1차원적으로 쓰여있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의 마지막 완성은 독자가 한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올렌카와 지나이다는 제목의 프레임에만 갇혀서 소모되는 인물들이었을텐데, 나는 이들을 동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대로 소비만 되기엔 너무 아까운 인물들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을 존중한다. 올렌카의 미련한 삶의 방식과 지나이다의 허망한 죽음에 존중과 애도를 하는 바이다. 우리는 일련의 이런 과정을 통해 타인을 보는 법을 한단계 성숙하게 끌어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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