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풀을 헤치고 생의 이유를 따왔소

아빠가 줄 수 있는 전부

by 주연

고향의 시골집은 대나무 숲을 등지고 있었고 멀리에는 바다가 보였다. 꼭 지금과 같은 여름밤, 눈을 감고 그 밤을 떠올리면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선풍기가 탈탈 돌아가는 소리, 이따금씩 귀뚜라미가 울어대는 소리가 재생된다. 그리고 그 소리들 사이로 불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뿌드득거리는 소리. 아빠가 이를 갈아대는 소리였다. 그땐 그게 무슨 소리인지 관심조차 없었고 소리라는 게 그렇듯 익숙하기에 별다른 의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나이를 먹고, 그게 이가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고, 아빠의 앞니 하나가 빠졌을 때에야 기가 막힌 마음이 들었다. 무엇이 그리도 분해서 저렇게 이를 갈아대는 걸까.


아빠는 참 똑똑한 사람이었다. 언니와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에 가는 대신 지난해 벽걸이 달력을 뒤집어 걸어놓고 매직을 죽죽 그어가며 설명하는 아빠표 수업을 들었다. 학원에 보내주진 못해도 교육열이 대단했던 아빠는 이제 막 초등학교 3학년 정도가 된 언니에게 ‘유리수’와 ‘무리수’ 개념을 가르쳤다. 벤다이어그램을 그려가며 열성을 다해, 이따금씩 침을 튀겨가며 설명하곤 했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나는 사탕을 까먹으며 한 귀퉁이 찢어준 달력에 낙서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숫자가 어떻고 저떻다는 얘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거듭되는 농사 실패에 하루 반 갑에서 한 갑으로, 한 갑에서 두 갑으로 담배 대수를 늘려대던 아빠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감 넘치는 사내로 변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자매는 그 시간이 싫지 않았다. 우리의 교과서 표지를 수업하다 남은 빈 달력으로 감싸고 또박또박 ‘수학’, ‘국어’ 등의 과목명을 적어 넣었던 아빠의 손 끝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번에는 버섯이 잘 되모, 느그들끼리 오데 여행이라도 갔다 오고.”


버섯 종류를 바꿔 새로운 버섯에 도전할 때마다 희망에 부풀었던 아빠는, 늘 맞은편의 여자 세 명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이번에는 정말로...’ 그러나 그렇게나 똑똑한 아빠가 밤새 서적을 읽고 새벽같이 일어나 버섯을 돌보아도 밑천 없이 시작한 농사는 늘 똑같은 한계에 부딪혔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눈에 띄게 시들어갔다. 화를 자주 내기 시작했고 엄마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일도 늘어갔다. 한밤중 말없이 버섯 농장에 갔다가 해가 밝을 때쯤에야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그땐 아무것도 몰랐던 언니와 나는 무섭게 변해가는 아빠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애쓰기만 했다. 자꾸만 윽박지르는 아빠의 높은 언성에 엄마도, 우리 자매도 움츠러든 채 집 안 모서리마다 각자의 자리를 찾았다. 부녀간의 수학 수업이 끝이 나고 아빠의 이갈이가 시작됐던 것도, 아빠가 혼자 있는 모습이 익숙해진 것도 바로 그때쯤부터였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아빠의 앞니가 남지 않게 되었을 때쯤, 대학 생활을 하다 가끔 고향집에 내려온 딸을 아빠는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버스에서 내린 딸을 트럭에 태우고 아무런 말 없이 시골집에 내려다 주는 것으로 왔냐는 인사를 대신하고, 이제 돌아가겠다 하면 저 언덕 밑에서 보지 않는 척 버스가 올 때까지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게 다였다. 딸의 대학 생활을 궁금해하지도, 물어보지도 않았다.

[느그 아빠가 무화과 따줐다.]


어느 날 엄마가 보내온 메시지에는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 딱 저렇게 한 줄, 사실관계만이 적혀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놀라서 답장했다.


[진짜? 어디 달려있던 긴데?]

[우물 옆에 수풀 안. 엄마가 먹고 싶다카니까 따줐다.]


엄마는 나에게 소녀처럼 자랑했다. 그저 밋밋한 메시지 한 줄이었지만 액정을 뚫고 나오는 들뜬 마음. 덩달아 흐뭇해진 나는 고향집에 내려가 있던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가 웬일로 무화과를 따줬대?]

[몰라, 진짜로 엄마가 먹고 싶다고 하니까 고생해서 따오데.]


엄마는 무화과를 받아 들고 한참이나 웃었다고 했다. 아빠는 단지 ‘그리 좋나’ 한마디를 하고, ‘무화과 옆에 벌이 날아다니는데 따왔다’, 덧붙이고 다시 농장에 갔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서 가벼운 걸음으로 그릇을 나를 수 있었다. 그 무화과, 나뿐만 아니라 엄마와 언니, 그리고 분명 누구보다 아빠에게 한동안 삶의 이유가 되었을 무화과. 엄마는 한참이나 보기만 하다가 더 놔두면 썩어버릴 것 같은 때가 되어서야 그 무화과를 먹었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전, 이젠 아빠의 치아가 거의 남지 않게 되고 딸내미들끼리 몰래 틀니의 가격을 알아보게 되었을 때, 아빠는 내 기억으론 생전 처음 가족끼리 외식을 제안했다. 엄마의 유방암 소식을 듣고 난 뒤 처음으로 고향집에 내려갔던 날이었다.


“철뚝에 새우구이집이 잘 돼있다던데 거서 밥이나 한 끼 하고...”


그 제안이 반갑지 않을 리 없는 세 명의 여자는 잽싸게 새우구이집을 찾고, 어떤 메뉴를 시키면 좋을지까지 미리 결정했다. 새우구이집으로 향할 때, 또 웬일로 아빠는 차에 블루투스를 연결해보라 했다.


“내 휴대폰으로도 된다든데...”


받아 든 아빠의 휴대폰에 음악 스트리밍 어플이 깔려있을 리는 만무했고, 음악 다운로드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튜브로 틀면 된다, 무슨 노래 듣고 싶은데? 하며 유튜브에 들어가 검색창을 누르는 순간, ‘유방암 4기’, ‘구충제’, ‘건강한 TV’ 등의 검색기록이 아래로 펼쳐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아빠가 유튜브를 어떻게 쓸 줄 알아서 이런 걸 검색했지, 하는 생각과 이걸 못 본 체해야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아빠, 그냥 내 폰으로 연결할게.”


그날 우리 가족은 새우구이 대자를 시켜서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특히 아빠가 잘 먹지 않아 좋아하는 해산물을 먹을 기회가 별로 없었던 엄마는, 언니와 내가 건네는 마지막 한 마리까지 사양하지 않고 다 먹었다. 분명 각자 몫의 어색함을 지니고 있는 가족 외식이었지만 누구도 티 내지 않았다. 처음부터 종종 외식을 다니곤 하는 가족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웃기 위해 노력했다. 고향집에서 부산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내 머릿속에서는 그때의 무화과와 지금의 새우구이 앞에서 해맑게 웃던 엄마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 삶은 이렇게도 버텨지는구나. 무화과로 인해, 새우구이로 인해, 우리는 한동안 삶을 포기하지 않겠구나,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