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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Apr 28. 2020

?=! 소담소담 : 죽음에 대하여

안락사와 존엄사는 다른 걸까? 인간에게 있어 죽음의 자유는 동등할까?

죽음도 우리 인간의 권리이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권리가 있다. 바로 ‘인권’이다. 그건 누구든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어떤 이유로 태어나던지 똑같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겪는다.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발전했다지만, 여전히 죽음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수백, 수천 년후에는 죽음을 거스를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그저 시간을 좀 더 버텨내는 것이 최선이다. 결국 ‘죽음’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특별하고도 보편적인 권리인 것 같다.


 죽음에 관해서 <인간 본성의 법칙>의 저자 로버트 그린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을 조금 인용해볼까 한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다 함께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계기로 더 깊은 공감을 느끼고 유대감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죽음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하나이고 그래서 평등하다.>


 그는 우리 인간들은 ‘죽음’ 덕분에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부의 정도나 삶의 환경, 태어난 시대 등등 그 어떤 외력으로도 죽음은 막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평등’도 우리 인간의 권리다.


죽음은 욕망이 덧없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죽음은 우리의 끝없는 소유욕, 성욕 등 욕망들을 결국 먼지보다 더 하찮은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우리 가까이 있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마치 우리의 일부를 잃은듯한 느낌. 왜 더 잘하지 못해 줬을까 하는 마음.


 약 한 달 전, 약 15년 정도를 엄마처럼 돌봐주시던 할머니께서 소천하셨다. 나의 부모님은 맞벌이 부부셨고, 자연스럽게 나와 쌍둥이는 할머니의 몫이었다. 어렸을 적엔 그런 할머니가 나의 기대에 못 미치면 쉽게 불평하곤 했다.

 돌아가시기 두 달 전쯤인가? 본집에서 나와 최근 지내는 집으로 내려가려는데 그날따라 할머니가 배웅을 나와주셨다. 평소에는 “멀리 안 나간다~ 조심히 내려가, 준아” 라며 가벼운 농을 치시곤 했는데..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내 손을 잡으셨다. 유독 차가웠다. ‘할머니 손이 이토록 쓸쓸했던가?..’


 사람은 이별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날이 딱 그랬다. “벌써 이렇게 컸냐”는 말이 그토록 슬픈 말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손주 결혼하는 것 기대되지 않느냐고, 보고 싶지 않느냐고 퍽 무거운 농을 치고는 무심한 척 차에 올라탔다. 쓸쓸한 손을 흔들던 할머니를 뒤로한 채 나의 무심함을 밟고 또 밟았다. 비가 내리는 날은 운전하기 위험하다는 말은 허위가 아니다. 그날은 맑고 화창한 날이었지만 운전하기엔 가장 위험한 날이었다.    


해주지 못한 것들



당신을 볼 수 있을 날이 아직 많이 남은 줄 알았어요

당신의 얼굴, 당신의 웃음, 당신의 표정

어느 하나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거든요


근데 이게 뭐예요 기억이 안 나요

사소한 사진 하나 사소한 영상 하나 직접 찍은 게 없어요

저는 왜 그걸 이제야 알았을까요


당신께 좀 더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줘야지 줘야지 손주의 성공한 책 보여줘야지

하루가 짧도록 쏘다녔어요 빨리 보여줘야 할 것 같았거든요


그냥 옆에서 하나하나 읽어줄 걸

이것 보라고 들어보라고 신나 하며 하나씩 읽어줄 걸

그래도 좋아했을 당신인데

저는 왜 그걸 이제야 알았을까요


이번만 지나면 옆에 좀 붙어있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절 알아보지 못하는 당신을 보니 당신의 이야기가 그리워졌거든요


옛날 얘기 들려달라고 졸라볼 걸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어볼 걸

그럼 신나서 얘기해 줄 당신인데

저는 왜 그걸 이제야 알았을까요


텅 빈 방안 활짝 웃고 있는 당신을 봤을 때

그저 목놓아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독 당신이 제 손 꼭 잡았던 날이 떠올랐을 때

그저 목놓아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를 보며 항상 흐뭇해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저 목놓아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죽음에게서 후회를 선물 받았다.

 

안락사? 존엄사?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안락사가 정확히 무엇인가? 존엄사는 무슨 말인가? 안락사와 존엄사는 다른 것인가?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안락사’는 <병자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안락히 죽게 하는 것>이라고 명시되어있다. 단어 자체도 ‘좋은 죽음’이라는 단어에서 태어났다. 그럼 ‘존엄사’는? <병자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존엄사는 연명치료를 중단하여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이다. 반면, 안락사는 약물 투여 등의 방법으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방법이다.(좀 더 인위적이다.)


 나는 두 방법 중 어느 한 방법이 ‘정말 옳은 방법이다!’라고 할 순 없을 것 같다. 단지, 두 방법 모두 어느 정도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누구는 ‘엄연한 살인이다’, ‘악용될 수 있다’, ‘존엄성을 위배한다’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지금으로써 내 짧은 식견으로는 죽음도 그/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라는 거다. 다른 분들도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 매체들이 이에 동의하고 있다. 이번 주제 이름 중 하나가 ‘죽음의 선택’이라는 것도 근거가 될 수 있겠다. 단지,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느냐, 타인이 선택하느냐는.. 좀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이 정도 생각 이외에 당장은 특별히 깊게 생각나는 건 없다. 어느 쌀쌀한 밤, 12시 39분의 방안에서는 그저 몇 가지 질문만 떠오를 뿐이다. ‘생명의 가치가 정말 무겁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의 자유가 무시될 수 있을까?’ ‘생명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생명을 다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게 존중받지 않는다면 어떨까?’ ‘만약 당사자가 도저히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가족이나 주변 사람이 대신 결정해 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유를 갈망하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안락사 혹은 존엄사가 허용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에게나, 사회에게나, 건강한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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