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

by 금교준

종종 별 이유 없이 텅 빈 순간을 느낀다. 해왔던 일들이 무색해지는 느낌. 지금껏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느낌. 삶이란 지독히도 허전한 것이라는 느낌. 이런 느낌들과는 막역해지기 싫은데.


그럴 때면 이런 류의 사색에 빠지기도 한다. 항상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 순 없을 텐데라는 식의 사유. 잠시나마 도전의 고통을 회피하려는 자기 위로적인 상념. 지금껏 무얼 하며 살아왔을까. 무얼 하고 싶었던 걸까 따위의 생각들.


그럼 한동안 우울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흑지 위의 행간에 빠진 것처럼 헤아리기 어려울 만치 먹먹한 낱말들만 떠올라서. 양껏 느꼈던 설렘 뒤의 여백을 채우기 위해 이별의 슬픔을 잔뜩 머금은 금잔화를 그려야 할 것 같아서.


다행히도 요즘은 당신이 있어서 그런지 이런 사색에서 제법 무난히 헤어 나온다. 행간을 보면 기대, 설렘, 용기 같이 사랑스러운 낱말들이 떠올라서. 여백을 보면 분홍 장미나 붉은 달리아, 동백꽃 같이 꽃말마저 예쁜 것들이 떠올라서.


새삼 떠오른 건데, 당신에게 낱말 하나 꽃 하나를 선물하게 된다면 이런 것들을 줄 거다. ‘약속’과 ‘백합’. 백합의 꽃말은 변함없는 사랑이라던데. 당신에게만큼은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해주고 싶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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