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생활이 익숙해진 요즘엔 허구한 날 책을 본다. 읽는 행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시선으로 글자를 좇는 일이다. 작업대 위, 펜꽂이 옆에 노란 드레스를 입은 사람이 춤을 추는 표지의 책이 보였다. <오직 한 사람의 차지> 한 달 전인가. 성격은 달라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비슷할 사람과 물물 대여한 책이었다.
글을 연모하게 된 후부터 호감 있는 사람에게 책을 빌려주거나 소개하는 일을 좋아했다. 모서리 이쪽저쪽을 접고, 줄을 죽죽 그으며 읽는 탓에 내 것을 읽는 사람은 ‘왜 이 부분에 줄을 쳤을까.’하며 취향을 짐작해볼 수 있을 거였다. 누군가에게 읽히는 기분. 사람을 좋아하는 나는 그런 걸 선호했다.
“이것은 허구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춤을 잘 춘다.”
별안간 펼친 페이지의 첫 문구였다. 문장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책은 문장으로 작가의 생각이나 감정 따위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물질이다. 특히 강렬하게 읽혔던 책은 다시 열어봤을 때 볼 수 있는 한 문장. 딱 그것만으로도 백 가지의 생각을 뇌 부근에 잔뜩 생성한다. 아주 가끔 책은 주인의 특징을 닮기도 했다. 이 책이 그랬다. 그에게 구매된 이후로는 죽 그의 집에 적을 두었을 터라, 작가의 성정보다 그의 기질을 좀 더 지니게 됐을 지도 몰랐다.
그가 아는 그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그는 모호하지만 확실하기도 한 감정선을 지닌 사람이다. 어렵지만 매력적이라는 의미다. 몇 마디 대화한 날이면 새벽 내내 그와 나눴던 마디 몇 개가 공간을 둥둥 떠다녔다. 그럼 나는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구나, 여기며 더 많은 걸 경험해봐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때론 애석했다. 그와 말을 섞고 나면 스스로가 한없이 어려보였으므로. 그동안 경험해왔던 것들이 너무나 작게 느껴졌으므로. 속절없이 안타까운 감정이 마음속에 자라났다.
애석함과 J를 연달아 떠올린다. J는 나한테 사랑에 관한 책을 추천해준 사람이다. 커뮤니티에서 만나 몇마디 나눴던 기억이 있다. 그녀도 예술계열의 사람이었던 지라, 일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심적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어려워도 군데군데 가슴에 박히는 문장이 있어요. 그녀가 책을 소개하면서 덧붙인 말이었다. 책의 내용을 일부 소개해보자면, 작가는 이런 말을 한다. 성숙한 사랑은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나부터 좋아해야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마음을 줄 수 있는 거라고. 맞는 말 같았다. 나를 온전히 버리면서까지 헌신했던 상대가 떠났을 때. 그때 느꼈던 허탈한 감정이 일순간 튀어 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녀와 나는 이후로도 몇 권의 책을 나누며 가까워졌다.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한 것들이었다. 메시지를 주고받고, 전화를 걸고. 어떤 날엔 다음날 출근날임에도 불구하고 밤새 통화했다. 그렇게 두 달 가량을 연락하다가 일 얘기도 할 겸 바다를 가게 됐다. 나는 바다 근처 마을에 그녀는 내륙에 살았던 터라 이번 만남은 그녀가 나를 보러 오는 형국이었다. 우린 터미널에서 만나 곧바로 해안가로 달렸다. 바다의 날씨는 좋았다. 하늘엔 적당한 양의 구름이 부유했고, 갈매기는 새우과자를 달라는 듯 사람들 근처를 서성이는 모양새였다.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다 보면 둘 사이의 거리나 벽 같은 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때가 그랬다. 모래사장을 걷고 있는데 별안간 낯선 기분이 됐다. 그녀와 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게 감지된 거였다. 이토록 강렬하다니. 내가 사랑이란 걸 하는 건지, 외로움을 채우는 단순한 일을 하는 건지 싶었다. 이렇게까지 흐릿했던 경우는 없었는데. 저녁이 되자 그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고, 나는 확신했다. 이건 사랑이 아니다. 그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다. 시작하기 전에 마감해야 한다. 아니, 이미 시작해버린 건가. 혼란스러웠다.
사랑이 뭔지 가장 빈번하게 고민한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이것은 허구지만 나는 종종 누군가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