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

by 금교준

저녁 7시가 넘었는데도 해가 밝다. 티브이에선 한창 장마일 거라고 떠들었는데. 하늘에선 예정된 비는 안 내리고 마른 햇볕만 주구장창 내렸다. 비를 한바탕 쏟아내면 시원해질 텐데. 나는 요즘처럼 찌는 듯한 더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다. 요즘엔 해가 제법 길어져서 8시가 넘어도 하늘이 파랬다. 술이 마시고 싶었다. 낮술은 자정을 당겨오는 성질이 있었으니까. 지금 당장 그걸 입속으로 부어 넣으면 얼른 까만 하늘이 될 거였다.


이왕 당긴 김에 술! 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나열해보기로 한다. 주량, 좋아하는 술의 종류, 선호하는 술의 조합 그리고 주사. 그러고 보면 누군가와 술을 마실 때마다 단골로 나왔던 질문이 있다. “주사가 뭐예요?” 처음 보는 사람도 일단 그런 질문을 받으면 자신의 기질 같은 것들을 줄줄 읊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다면 그것만큼 제격인 게 없었다.


“나는 하염없이 걸어요.”


여대에 다니던 애가 한 말이었다. 이유는 딱히 없다고 했다. 술도 마셨고, 기분도 좋고, 분위기도 무르익었고. 그러다 갑자기 눈을 뜨면 집 방향으로 걷고 있다고 했다. 그런 주사는 생전 처음 듣는 거였다. 당시의 내 기분을 설명하자면 그래, 지금은 오후 열 시니까 아침이네!라고 누군가 외치는 걸 목도한 듯했다. 하도 신기해서 그 말을 잊을 수가 없다. 하염없이 걸어요.


그 애랑은 술을 마시면서 알게 된 사이였다. 술 얘기를 하다 연인도 됐다. 술과 우리는 분명 전생에 쌀과 효모, 증류와 알코올, 그 정도일 거였다. 데이트를 하면 열이면 아홉은 술집이었다. 영화를 보고 카페를 가자. 밤이 되면 닭발에 소주를 곁들이는 거야. 내일은 맥주와 치킨. 초밥이랑 맥주도 잘 어울리는 거 알지? 대충 이런 식이었다. 나도 그녀도 적잖이 술을 좋아했던 터라 새벽까지 마시곤 다음날 저녁까지 퍼질러 자는 게 일상이었다. 술 좋아하기 콘테스트가 열리면 보란 듯이 우수상 정도는 탈 거였다. 그리고 그 애랑 헤어지게 된 것도 술 때문이었다.


“우리 내일 데이트할까? 저녁에 약속 없다고 했지?”

“사실 내일 Y대 남자애들이랑 술 마시기로 했어요. 이제야 말해서 미안해요.” 그녀가 평소와 다르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고 보니 그 애는 내가 뭔가 물어보기 전에 먼저 말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 뭐 하는 지도, 뭘 좋아하는 지도, 뭘 먹었는 지도, 주말에 연락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그 말은 지금껏 그 애가 내게 말하지 않았던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앞으로는 무슨 일을 할지. 그런 것들을 묻지 않는 이상은 결코 알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미래에 내가 없는 사람과 더 만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러다 홧김에 이별을 고했다.


그 애랑 헤어지고 한 달쯤 지났을 때였나. 서울에서 술을 마셨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도봉구 위의 차도 위를 걷고 있었다. 집은 양주니까 아직 세 시간은 더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술을 먹고, 친구들과 웃고, 가게 사장님이랑 같이 건배도 하고 즐거웠는데. 왜 나는 이 도로 위를 걷고 있을까. 그렇게 기억의 조각들을 짜 맞추고 있는데 별안간 그 애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하염없이 걸어요.


어렴풋이 그녀가 왜 무심해졌는지 알 것 같았다. 하늘은 여느 날보다 어두웠고, 나는 아무렇게나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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