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켜진 건물

by 금교준

7월의 밤. 해가 졌어도 열기는 한창이다. 어느덧 무더위의 계절이 문을 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늦은 9시에 밖을 나가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 기분이 좋아졌는데. 이제는 땀이 난다. 어젯밤엔 자정이 넘도록 산책로를 걸었다. 쿵쿵- 별안간 반복적인 기계 소리가 들리며 불 켜진 공장이 보였다. 이 시간에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많구나, 싶었다. 낮에는 누군가를 간호해야 하거나, 집안 사정이 있어서 밤에도 일을 해야 하거나. 생각해보니 나도 비슷했다. 종종 낮에는 감정이 잘 올라오지 않는단 이유로 해가 떨어졌을 때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좋든 나쁘든 남들 잘 시간에 일해야만 하는 속사정이 하나씩은 있을 거였다.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사람들. 그런 걸 생각하면 꼭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H다.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의 어머니이면서 내게 ‘장모’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느끼게 해 줬던 사람이다. H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계속 일을 했다. 그 당시 애인의 통금 시간은 열 시였는데,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고 나면 곧잘 H의 직장 앞으로 가곤 했다. 걸어서 이십 분 거리. 항상 내가 그곳에 도착하는 시간엔 그녀가 슬슬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럼 우린 나란히 집 방향으로 걸었다.


“네가 정말 내 사위가 된다면,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믿음직스러워.”


그녀가 말했다. 만나는 사람의 어머님에게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형편이 어려운 거 알면서도 우리 딸을 변함없이 좋아해서 고맙다고 했다. 당신까지 챙겨주니까 더 정이 간다는 말도 덧붙였다. 가끔 애인의 집에 가서 다 같이 식사를 할 때면 이것밖에 못 해줘서 미안하다는 말도 했다. H의 말버릇이었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다고 그러시는지, 나는 지금도 충분히 좋은데. 그녀가 버릇처럼 사과할 때마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시 애인과는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됐다. 그녀는 서울시 강남구에 평수가 꽤 넓은 집에 살았다. 부모님의 직업은 듣기만 해도 우아하고 기품 있는 분위기를 지닌 것들이었다. 그래선가. 그녀의 입맛은 나와는 영 딴판이었다. 그녀는 국밥보다는 파스타. 곱창보다는 스테이크. 천 원짜리 아이스크림보다는 오천 원은 줘야 살 수 있는 브랜드 아이스크림을 선호했다. 데이트할 때마다 사람 간의 격차가 눈에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언제 한번 그녀의 부모가 나를 탐탁지 않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결심했다. 돈 말고 인간미가 넘치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을 만나야지, 하고.


인간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3요소는 입을 것과 먹을 것, 그리고 잘 곳이다. 요즘 세상에선 돈이라는 항목 하나를 종교처럼 추앙하며 그 사이에 꽂아 넣기도 한다. 그것만 있으면 옷도 사고 음식도 사고 집도 살 수 있으니까. 나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것 같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 애틋한 마음이다. 사람은 그게 있어야 비로소 행복해진다.


“이것밖에 못 해줘서 미안해.”


불 켜진 건물 쪽에서 H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밤공기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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