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by 금교준

깜빡.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었다. 배고픈 것도, 몸이 찝찝한 것도 그냥 견디고 말지 뭐, 하게 되는 날. 왜인지 나 자신이 무력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틀어놓고 등받이 쿠션에 한껏 기댄 후 자다 깨다 했다. 밖에선 간헐적으로 빗소리가 들렸다. 쏟아졌다가 그쳤다가. 요즘엔 비가 와도 더운 공기가 가시질 않는 터라 나는 창문을 굳게 걸어두고 애꿎은 에어컨만 켰다가 껐다가 했다. 가끔 너무 오래 튼 것 같으면 당분간은 찬물만 몇 번이고 들이켰다. 그러고 보면 밖이랑 별다를 게 없었다. 영화는 무료하고, 일도 손에 안 잡히고, 게임도 별로 당기지 않았다. 뭘 해야 하지. 잠자코 자는 건 또 성미에 안 차는 터라 뭐라도 찾아야 했다.


깜빡. 보드게임. 별안간 그게 보였다. 요즘 들어 자주 생각나는 사람이 좋아하던 것. 책장 위에 쌓여있는 세트들도 그녀와 동거할 때 사둔 것들이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집 근처 마트로 장을 보러 다녔다. 지상 일 층에는 장난감 코너가 있었다. 그녀와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었다. 그녀는 이것도 재밌대, 저거 해보고 싶다, 이건 너무 비싸네, 했다. 그러다 내가 이거 사다가 해볼까? 하면 괜찮아, 하면서도 얼굴은 꽃을 본 듯 웃었다. 그렇게 하나 둘 쌓인 게 여섯 개나 된 거였다. 덕분에 영화나 디지털 게임, 책 이런 것들에 흥미가 동하는 날이라도 몇 시간 동안은 제법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빈치 코드, 루미큐브, 할리갈리... 그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재미있어했던 건 농구 게임이었다. 1번부터 8번까지 번호가 적힌 버튼이 있고, 그들을 누르면 코트 위에 긴 막대기가 불쑥불쑥 튀어 오른다. 그 힘으로 작은 공을 쳐내어 상대편 골대로 넣는 방식이었다. 덜컥 덜컥. 그녀와 게임을 시작하면 그런 소리가 방을 메웠다. 앗! 안돼! 하는 소리도 군데군데 울렸다. 서로의 득점 소식을 셈하면서 우린 승부욕을 불태웠다. 봐주는 건 없었다. 죽어라 열중했던 게 기억난다. 한 시간 정도 그 게임을 하고 나면 손가락이 얼얼할 정도였으니, 제삼자가 구경할만했을 거였다.


깜빡. 잠에 들었다가 깼다. 안 좋은 자세여서 그런지 손이 얼얼했다. 누군가 꿈에 나온 걸지도 몰랐다. 윤, 별안간 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떠오른 건 오랜만이라 생경한 기분이 됐다. 시선은 보드게임 위로 가 있었다. 나는 윤, 하고 몇 번 발음했다.


보고 싶은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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