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드립 기구들이 눈에 보인다. 두 달 정도는 손을 대지 않은 것들이다. 기필코 습관으로 만들겠다던 다짐과는 다르게 먼지만 폴폴 쌓이는 중이다. 충동적인 결심은 유효기간이 짧은 걸까. 그래도 처음에는 꽤 자주 사용했었다. 누군가의 너 그거 얼마나 갈 것 같아? 란 말이 일으킨 반향이었다.
새삼 핸드드립 과정을 복기해본다. 원두를 갈고, 드립 포트로 물을 데우고, 드리퍼에 필터를 깔아놓는다. 잘게 갈린 원두를 필터 위에 펀펀히 붓고는 뜨거워진 물을 시계방향으로 따른다, 균형감 있게. “똑, 똑, 똑”하고 갈색 액체가 서버로 떨어지는 걸 멍하니 본다. 소리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다, 고 생각한다. 커피가 가득 생겼다는 걸 인지한다. 이건 얼음이 물이 되는 것과 이치는 다르지만, 분명 하나의 존재가 고체에서 액체로 변하는 과정이다.
단단함. 흐르지 않음. 뚜렷하고 고정된 형태가 있음.
똑, 똑, 똑
유함. 유동적임(흐름). 형태가 마구 바뀜.
일련의 과정을 거쳐 다른 성질을 갖는 것. 원두의 특징이었다. 사실 이건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내게 좋아한다고 해놓고 질렸다고 말했던 사람. 그녀에게 나는 헤어지고 싶은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두는 눈치 없는 인간, 딱 그랬을 거였다. 내가 한 건 같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본 것. 매일 집에 데려다준 것.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도망쳐 나와서 약과 죽을 사다가 문고리에 걸어놓은 것. 딱 그 정도였고.
똑, 똑, 똑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이젠 네가 남자로 안 보여. 재미가 없거든. 유머감이나 센스. 그런 게 연애를 하기 위한 필수 능력이라는 걸 그녀 덕에 알았다. 그러니까 나는 원두를 갈아 커피를 만드는 과정을 수십 번 반복하는 일처럼, 데이트도 똑같은 순서를 거듭했던 거였다. 그래서 가장 좋아했던 사람을 떠나보낸 거였다.
오래된 원두 봉지를 열었다. 쓴 향과 신 향이 동시에 났다. 나 지금 그리워하는 건가. 어디선가 노크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