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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상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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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Jun 08. 2022

여름 기운

여름 다음에 오는 계절을 가장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껏 쓸쓸해해도 궁상맞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 년의 사 분의 삼 지점. 그 한철에만 허용되는 것들을 나는 선호했다. 여름에 충전해둔 기운 꺼내써 봐요. 정말 나아져요. 그 해, 그 계절에, 나는 그 사람의 말을 자주 가져다 썼다. 일종의 신앙이었다, 그건. 용하다고 믿으면 용한 것처럼 문득 서글퍼질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리면 왜인지 살만해졌다. 목소리가 들려서 그랬나. 어찌 됐건 화창한 날마다 자연 소리를 녹음하던 그 사람은 파일만 서너 개 남겨두고 떠났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사람을 따라 녹음해둔 것을 지우지 못한 거였지만.      


그 사람은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소유하고 싶어 했다. 익숙한 소리가 들리면 이건 멧비둘기* 울음이야 했고, 녹음하는 동안에는 숨을 죽였다. 그렇게 해야만 작은 소리까지 선명하게 녹음된다는 거였다. 나는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서투른 척을 했다. 휴대폰을 손바닥 가득 움켜잡고는 팔을 어색하게 뻗었다. 그 사람은 손바닥에 올려만 둬요, 마이크는 바깥쪽으로, 하고는 내 손을 돌려 폼을 슬쩍 고쳐주었다. 나는 그때 과일 향이 나던 입술을 쳐다보느라 고맙다는 말을 미처 못 했다.     


 사람 말에 따르면 초여름에 모아둔 기운은  익은 과실과 같아서 기력 없는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먹힌다. 생명의 힘이랬나. 실제로 우울해하거나 울고 싶어 하는 친구에게 녹음 파일을 들려주면 대뜸 울어버리거나 어이없어하면서 웃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런  어디서 배웠냐는 물음을 들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적마다 나는 조금 서글퍼졌다. 물론 울적한 사람 앞에서 서글픈 척을   없는 노릇이라 좋은  좋은 거지, 했다.      


진부한 대답은 가끔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을 은연중에 전해주는 기능이 있어서 모면하고 싶은 순간을 곧잘 모면하게 했다.     


초여름, 하면 나는 그 사람이 생각난다. 습하고 축축한 여름을 가을만큼이나 좋아하게 만든 연유에 제법 큰 몫을 하기도 했고, 풀벌레가 많은 동네에 정을 붙이게 된 것도 그 사람 때문이었으므로. 담벼락에 매달린 앵두를 떼어먹었던 거, 열대야가 기승이던 밤에 마당에 누워 별을 봤던 거, 별들을 이어주려고 우리 동네 별자리를 공부했던 거, 쉬는 날 종일 끌어안고 있던 거. 그런 기억들이 잊을만하면 하나씩 떠오르는 바람에 밤잠을 설친 적도 있었다.     


* 멧비둘기 : 번식기에는 숲에서, 번식기가 아닌 때에는 농경지 주변에서 생활한다. 하필이면 우리가 농경 마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나, 빌딩 숲이든 우거진 숲이든 당신은 누군가와 잘 지내고 있나,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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