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다음에 오는 계절을 가장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껏 쓸쓸해해도 궁상맞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 년의 사 분의 삼 지점. 그 한철에만 허용되는 것들을 나는 선호했다. 여름에 충전해둔 기운 꺼내써 봐요. 정말 나아져요. 그 해, 그 계절에, 나는 그 사람의 말을 자주 가져다 썼다. 일종의 신앙이었다, 그건. 용하다고 믿으면 용한 것처럼 문득 서글퍼질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리면 왜인지 살만해졌다. 목소리가 들려서 그랬나. 어찌 됐건 화창한 날마다 자연 소리를 녹음하던 그 사람은 파일만 서너 개 남겨두고 떠났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사람을 따라 녹음해둔 것을 지우지 못한 거였지만.
그 사람은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소유하고 싶어 했다. 익숙한 소리가 들리면 이건 멧비둘기* 울음이야 했고, 녹음하는 동안에는 숨을 죽였다. 그렇게 해야만 작은 소리까지 선명하게 녹음된다는 거였다. 나는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서투른 척을 했다. 휴대폰을 손바닥 가득 움켜잡고는 팔을 어색하게 뻗었다. 그 사람은 손바닥에 올려만 둬요, 마이크는 바깥쪽으로, 하고는 내 손을 돌려 폼을 슬쩍 고쳐주었다. 나는 그때 과일 향이 나던 입술을 쳐다보느라 고맙다는 말을 미처 못 했다.
그 사람 말에 따르면 초여름에 모아둔 기운은 잘 익은 과실과 같아서 기력 없는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먹힌다. 생명의 힘이랬나. 실제로 우울해하거나 울고 싶어 하는 친구에게 녹음 파일을 들려주면 대뜸 울어버리거나 어이없어하면서 웃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냐는 물음을 들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적마다 나는 조금 서글퍼졌다. 물론 울적한 사람 앞에서 서글픈 척을 할 순 없는 노릇이라 좋은 게 좋은 거지, 했다.
진부한 대답은 가끔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을 은연중에 전해주는 기능이 있어서 모면하고 싶은 순간을 곧잘 모면하게 했다.
초여름, 하면 나는 그 사람이 생각난다. 습하고 축축한 여름을 가을만큼이나 좋아하게 만든 연유에 제법 큰 몫을 하기도 했고, 풀벌레가 많은 동네에 정을 붙이게 된 것도 그 사람 때문이었으므로. 담벼락에 매달린 앵두를 떼어먹었던 거, 열대야가 기승이던 밤에 마당에 누워 별을 봤던 거, 별들을 이어주려고 우리 동네 별자리를 공부했던 거, 쉬는 날 종일 끌어안고 있던 거. 그런 기억들이 잊을만하면 하나씩 떠오르는 바람에 밤잠을 설친 적도 있었다.
* 멧비둘기 : 번식기에는 숲에서, 번식기가 아닌 때에는 농경지 주변에서 생활한다. 하필이면 우리가 농경 마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나, 빌딩 숲이든 우거진 숲이든 당신은 누군가와 잘 지내고 있나,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