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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Aug 21. 2020

너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그거.. 병이야

근데 과대망상도 잘 쓰면 대박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현실보다 약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점에서는 내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고 싶은 깊은 욕구가 있다.” - 로버트 그린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자기애가 상당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본인이 최우선이고, 본인이 가장 잘났다. 그런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어딘가 모르게 ‘꼴 보기 싫다’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 그런데 사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성향을 조금씩은 갖고 있다는 걸 아는가?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작가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자기애를 갖고 태어난다. 예를 들어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혹시 학교 시험에서 친구를 이겼을 때, 남모르게 우월감을 즐기진 않았는가? 혹시 운동, 글짓기 등 다양한 대회에서 상을 탔을 때, 뭐든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는가? 이러한 느낌은 본성적으로 ‘자기애’ 그리고 ‘과대망상’적인 부분을 약간은 타고나기 때문에 생긴다. 문제는 이 자기애가 평균 수준을 넘칠 때다.

 

과대망상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


자기애가 과도하면, 스스로의 가치를 과하리만치 높게 평가하고 싶어 진다. 한마디로 ‘과대망상’을 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 중에서도 부정적인 3가지 유형을 소개해보려 한다.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처럼 자신은 무한히 겸손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성이 높은 사람 즉, ‘성인’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정받을 만한 일을 하더라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걸~’ 등과 같은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준다. 학창 시절, 70점 맞은 친구가 90점의 친구에게 ‘대단하다 너~’라고 칭찬한다고 해보자. 이때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걸 뭐~”라는 대답이 돌아간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한 번쯤.. 겪어봤던 경험이 있다. 기분이 참 묘했다.)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입어버린다. 마치 스스로를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밀어 넣는 것 같이 행동한다. 그래서 자신을 극한으로 밀어 넣고, 실패를 겪음으로써 세상 불쌍한 피해자가 되어 관심을 독차지한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그러한 관심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약 주변에 피해자의 옷을 과도하게 입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 생각해보자. 혹시 그 사람 주변의 모든 상황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그 사람이 고통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가? 알고 보면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해자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게 이 유형이 무서운 이유다. (내가 한 짓도 아닌 일로 이미지가 깎이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세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말 그대로 자신의 가치를 마치 신처럼 여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반대 성향을 보이면, 격분한다. 말 그대로 ‘격분’이다. 그냥 화 정도가 아니다. 세상 무너지는 죄를 지은 것처럼 화를 낸다. 그럼 상대방은 의견을 제시한 것뿐인데도 자존감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될 수 있다.

 

그들은 왜 과대망상을 가지게 됐을까?

 

과대망상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며 다닌다. 근데 대체 왜 그러는 건지 궁금하지 않은가? 어떻게 그토록 심한 과대망상을 가지게 된 건지 말이다!


다행히도 하인즈 코헛이라는 정신분석학자가 과대망상의 발생원인을 밝혀냈다. 후려쳐서 말하면, 어린 시절의 특정 시기를 경험했느냐가 과대망상의 발현 정도를 결정한다. 우리는 갓난 아기 때 부모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자란다. 밥 먹고 싶다며 울면, 밥을 먹여주고, 볼일을 본 후 불편함에 울면 기저귀를 갈아준다. 한마디로 원하는 게 있으면 모든 것을 해준다. 마치 ‘신’이 된 것처럼! 

정말 중요한 건 바로 지금 말하려는 이 시기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신이 아니구나’라는 느낌을 받는 시기 말이다. 조금 크다 보니까 걷는 것 하나도 제대로 되지 않음을 느낀다. 좀 더 지나면 밥을 스스로 퍼다 먹어야 한다. 혼자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 이 말인즉슨, 내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러면서 우린 스스로를 작은 존재라며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는 자기애의 끝없는 성장을 막고 적당한 겸손을 알도록 해준다. 그런데 이 시기를 겪지 않게 되면? 말 그대로 응석받이 투성이의 ‘과대망상자’가 된다. 


이 이야기를 현실로 끌고 와보면, ‘떼를 쓰는 아이를 막지 못하고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경우’, ‘아이가 힘들어할 때마다 뭐든 대신해서 도와주는 경우’ 등등의 환경에서 자란 아이라면, 과대망상적인 사람으로 자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새삼 깨닫게 되는 게, 뭐든 적당한 게 좋은 것 같다는 사실이다. 만약 아이를 ‘온실 속의 화초’로만 키우고 싶다면, 그래서 후에 사회에 진출했을 때 온갖 고통과 좌절을 겪게 만들고 싶다면 이런 교육방법도 뭐..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만약 내가 과대망상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런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어? 이거 약간.. 내 얘긴데?’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 당신이 이상한 게 아니다. 나 또한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처음에 우리는 누구나 과대망상을 갖고 있다는 걸 상기해보자.) 우리는 이러한 과대망상적인 에너지를 조금만 신경 써주면 '쏠쏠하게' 쓸 수 있다. 


먼저 필요한 건 과대망상하는 나의 생각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싶어 한다.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싶어 한다. 만약 그런 욕구가 든다면, 부정하지 말자. 부정해서 기분을 망치는 것보다는 ‘나는 인정받고 싶다’라는 걸 인정하고 ‘인정받기 위해선 뭘 해야 할까?’를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는 게 훨씬 낫다. 

과대망상 욕구를 인정했다면, 다음에는 이 욕구를 일이나 취미 등에 집중시켜보는 게 중요하다. 위와 같이 ‘인정 욕’에 대한 과대망상을 예로 들어보자. 실제로 일을 완료함으로써 인정받는 나를 상상하고, 그 일을 집중하여 끝냄으로써 인정받는 현실을 만들어내는 거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집중할 일을 고를 때, 내 능력보다 조금 어려운 일을 선정하는 일이다. 너무 어렵지 않으면서도, 남에게 인정받는 모습을 상상하기에 딱 좋은 정도면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만약 사람들 앞에 나가서 PT를 한다거나 모임을 진행해야 하는 경우에도 과대망상적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다. ‘내가 최고야!’ ‘이건 내가 가장 잘 알지’처럼 과대망상으로 무장을 하고 무대로 올라가는 거다. 그럼 이 에너지가 십분 발휘돼서 평소보다 강한 카리스마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해보자. 과대망상은 너무 겸손해서 재수 없거나, 남몰래 내 이미지를 깎아버리거나, 내 자존감을 깎아버릴 수 있다. 그들은 어렸을 적 소위 ‘오냐~오냐~’하며 큰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이를 잘 이용한 사람들이 많다. 과대망상이 심하다고 해서 마냥 미움받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과도한 인정 욕을 일 에너지로 바꿔서 뛰어난 성취를 이루는 경우가 있겠다. 아니면, 과도한 자신감을 갖고 사람들 앞에서 하는 PT를 기깔나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 우리 중에서 이런 성향을 갖고 있다면 한 번쯤 긍정적인 방향으로 에너지를 사용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추천 책 : [인간 본성의 법칙] - 로버트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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