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수련회를 통한 신앙고백
1. 간증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교육이지만 2시간의 교육을 받고 나면 일주일 내내 평소와는 다른 시간이 찾아온다. 간증을 하다 보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얘기를 한다. 잘 알지도 못하고 더구나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앞에서 솔직한 고백을 한다는 게 불편하다. 더구나 나는 아내와 함께 교육을 받고 있다. 아내 역시 나와 비슷한 불편함이 있을 것이다.
나는 조장에게 식사를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간증하는 건 그런 이유가 있어서 불편하다고 얘길 했다. 자신을 표현하는 일은 아예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곳은 모두 형제와 자매의 이름으로 만났지만 그것은 교육을 받을 때나 교회 안에 있을 때의 호칭일 뿐이지 교회를 나서면 서로가 형제자매가 아니라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설령, 하나님 아래가 아닌 실제로 피를 나눈 형제자매라 할지라도 걸어내야 할 이야기는 많기만 하다. 본질적으로 모든 고백은 골방에서의 자백이 아닌 이상 타인을 의식하게 되어있다. 그 어떤 간증이 솔직한 고백의 증언이 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고 그 어떤 진정성에 대하여 깊은 회의를 느낀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거짓을 행했고 말해왔던가.
2, 회개
교회에서 시행되는 모든 교육은 심화될수록 일정한 결론에 종착하게 된다. 자기반성과 삶의 전환, 혹은 원죄의식과 자범죄에 대한 메타노이아(회개)로 귀결되곤 한다. 그러한 회개를 통하여 다시 살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써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면 삶이 바뀐다.
3. 고난이 아닌 기쁨으로
애굽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자유의 가나안, 풍성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예수의 골고다 언덕,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한다. 지금까지의 삶은 충분히 고난스러웠다. 예수를 연상하면 가시면류관을 쓴 십자가상의 예수를 떠올리게 된다. 나는 그런 예수보다 웃고 있는 예수가 더 좋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보단 믿음으로써 인생이 즐겁고 행복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못 박히려만 하는가. 그것은 이미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셔서 다 이루어낸 일이 아닌가. 교회를 다니면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이들의 멸시와 어려움을 꼭 겪어야 하는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면서 우리의 삶은 보다 즐거워야 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이 돼야 하지 않을까. "주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며 고통 속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했던 예수의 희생과 그 대속을 감사하자. 그리고 담대히 믿자. 우린 더 이상 고난당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즐겁게 살자. 기쁜 마음으로 믿고 행복하게 교회에 다니자.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주님은 복음을 전하셨고 우리의 마음 안에 살아계신다.
더 즐겁게 살자. 우리들은 주님의 자녀들이요, 신부요, 형제요, 또한 친구가 아닌가. 우리가 행복하고 기뻐해야 주님도 기뻐하신다.
4. 교회
어제 일요일을 교회에서 온종일 보냈다. 현재 받는 수련회 때문이다.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은 나보다 교회생활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교회라는 곳에 집중되어 있다. 교회는 세상과 단절된 곳이기도 하다. 미자립 교회와 기타 손길이 필요한 곳에 성그을 보내며 도와주기도 하는 곳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세상과 단절된 듯한 느낌을 받는 곳이다.
지금 말하는 바는 나의 소속된 교회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교회 자체가 갖는 세상적 이미지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병든 사회와 세상 속에서 물들지 않고 정결한 모습으로 누구에게나 밝은 빛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지금까지의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미래를 위해 해결해야 할 일이다.
5. 강권적인 교회
여러 가지 모양의 프로그램들이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은 아무래도 내게 잠재된 불순종적인 근성 때문인 것 같다. 어떤 의심이나 질문에 쉽게 다가설 수 있지만, 교회가 주는 답은 언제나 정해진 교리에 맞춰져 모든 결론이 난다. 교회는 교회에서 말하는 교회의 법이 있고 기독교 자체가 갖는 교리가 있다. 그것은 상당히 거대한 강제 율법이다.
그것은 때에 따라서 어떻게 수정할 수 없는 기독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다른 생각과 다른 그 어떤 믿음은 교회에 의해 수정되고 교리에 맞게 교정된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에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날의 주제를 목사님이 설교하고 조별 토의를 하는데 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이야기 자체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는 교회이다.
6. 가정을 위한 교회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교인이라는 점을 나는 잠시 잊어버릴 때가 있다. 나는 앞으로 7회의 교육이 더 남았다. 여기에 쏟는 정신적 고충이 무겁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이 시간을 통해서 같은 장소와 시간 속에 아내가 있다는 점이다. 같은 시간 속에서 같은 주제를 갖고 함께 하는 시간이다. 아내는 조용한 성격이라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간증을 경청하는 편이다. 아내가 무슨 얘기를 할까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그렇지만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있다.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정을 위한 교회 출석이다.
7. 허공
비가 내렸다.
한 번은 간증을 해야 할 것 같다. 사람들 앞에 섰다.
뭔가 준비했어야 했다. 할 수 없이 생각나는 대로 얘기하고 들어왔다. 남 앞에서 자신의 얘기를 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아내도 앉아서 경청하고 있었다. 순조롭게 지나가고 있었다.
아내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나는 다른 간증자들처럼 신앙심이 뜨겁지 못하고 열정적이지 못하다. 자기 위장에 강한 면이 내게 있다. 인생의 굴곡에서 하늘의 뒷모습을 목격한다. 아무것도 없다.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어느 학생의 기도가 떠오른다.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8. 아내의 눈물
지난주 나의 간증에 이어 오늘은 아내의 간증이 이어졌다. 나와 살면서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는 아내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아내는 그런 말을 간증하는 동안 꺼내진 않았다.
아내는 남 앞에서 자신의 얘기를 말하지 않는 편이다. 마음을 열고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면 마음속 응어리가 풀릴 수도 있는데 아내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다. 아내는 호명되어 강단에 올라섰다. 이미 조별 토론을 통해 교우들과 대화를 나눈 상태이기에 순조롭게 발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간 남편과의 안 좋았던 시간이 있었고 대화를 서로 나눌 수 없었던 시간에 관해 얘기를 하다가 눈물을 터트렸다. 아내는 앞에서 자신의 얘기를 듣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아무 생각이 안 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몹시 미안해졌다. 머리를 숙였다. 최대한 내 얼굴이 아내의 시야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약 5~6분간의 짧은 간증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아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있는 나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모든 게 미안하고 그렇게 울며 얘기하는 아내가 너무나 가련해 보였다.
감정의 조절이 힘들었지만 만약 눈물을 보이면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아내와 교육에 참여하는 것에 적극적인 나의 태도는 모두가 아내를 위한 연극인지도 모른다. 아내를 위한 무대의 조연배우로서 나는 아내가 마음의 문을 예전보다 더 활짝 열고 지난날의 아픔과 상처에서 치유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9. 사랑은 목숨
예전에 사랑과 전쟁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거기에 보면 사랑이 시들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혹한의 계절을 겪기도 하고 심한 몸살을 겪으며 전쟁을 치르는 모습이 나왔다. 나는 전쟁터에 나온 병사이다.
평화와 사랑의 고지를 점령하고 그 언덕 너머의 참 평화와 참 사랑이 영글어 있는 그곳에 가기 위하여 나는 지금 수단과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다.
가정이라는 이름이 아들과 딸과 아내와 아버지라는 타이틀이 내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이다.
10. 기독교
기독교 죄악과 융통성 없는 오직 하나의 믿음과 교리 외에는 다른 그 어떤 것에도 구원이 없는 기독교라는 신앙이 나의 개인적 취향과 일치하지 않는 면이 많다.
죽음 이후의 천국행이나 지옥행 티켓에 나는 관심이 없다. 내가 교회생활 충실히 하고 가족과 믿음의 공동체 일원으로서 살아갈 때 아내는 웃고 아이들도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다.
나의 삶을 웃게 만드는 기독교, 나의 아내와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교회라면 만족한다.
오늘은 수련회 전에 여성들은 피구대회를 했고 남성들은 족구 시합을 선교회별로 실시했다.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뛰었다. 아내는 만 쪽에서 피구를 하며 웃고 있었다. 그렇게 밝게 웃는 모습을 언제 보았던가... 왠지 미안했다 계급 차별이라는 부정적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전도사나 목사라는 직분은 내겐 상당히 권위적이거나 특별한 계층으로 받아들여졌다.
자기를 낮춘다는 것이, 고난의 십자가에 동참한다는 것이 이미 세상 속에서 한없이 추락하고 낮아진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정작 자기를 낮추지 않는데 그러한 자들을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자들이란 게 황당했다
여러 가지 사건들로 생활의 혼잡으로 정체되었을 때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자식과 아내와 교회와 여러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정적이었다. 가족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일이었다.
모든 걸 정리해보면 지금의 아내는 내가 동참하여 즐겁게 교회를 다니고 함께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졌음을 만족하고 있다.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웃는다면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고 교회를 비난하고 그런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은 자기만 구원받고 천국 가려고 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는 말을 건네기도 한다. 그러한 비난과 조롱은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할 부분도 있다. 현재 기독교의 일그러진 자화상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나에게 교회는 믿음의 발판이고 교회는 가족 공동체의 평화와 행복을 제공하는 사랑의 공급소이다. 나는 날마다 행복해지고 있다. 이러한 행복과 사랑이 깨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11. 성령
소요산 부근에서 조금 더 가면 베데스다 기도원이 나온다. 아침 일찍 가족과 함께 교회로 향했다. 관광버스를 타고 의정부와 양주를 지나 수련회장으로 향했다. 미리 도착한 선발대 봉사자들과 목회자들이 마중 나왔다. 차에서 내리자 벚꽃이 바람과 뒤섞여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한겨울 내리는 눈처럼 하얀 마음이었다. 시간 계획에 의해 목사님의 토크와 조별 간담회가 이어졌다. 오늘의 주제는 성령이었다.
성령이란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신비로운 영성, 혹은 보혜사, 중보자 등등의 단어가 생각났다. 한편으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공통점은 육안적 시선으론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떠한 감각도 아닌 막연함이 들었다. 더구나, 나는 신비주의나 방언 기도 등을 신뢰하지 않으며 원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성적인 기독교를 원한다.
그러나, 성령을 다시 생각했고 느끼고 싶었다. 생각을 조금 바꾸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늘 중요한 건 성령 수련이었지만 동행한 아들과 딸이 즐겁게 웃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자연 속에서 말없이 피어나는 들꽃과 나무들의 오래된 향기가 나를 즐겁게 만들었다.
저런 웃음을 그린 화가는 누구인가. 아내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저렇게 환한 웃음을 결혼 20년간 난 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까. 내가 아내를 많이 외롭게 했을까. "아내는 그동안 외로웠다. 쓸쓸해질수록 아내는 하나님 앞으로 더 나아갔다. 그리고 기도했다. 철없는 계절이 지나가고 이렇게 봄이 다시 왔다.
나는 많은 걸 비워야 한다. 내가 가진 욕심, 집착, 야망, 집념을 넘어선 또 다른 열정 등의 여러 가지 낱말들을 포개어 넣는다. "현상 수배범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단 지금 내게 보이는 저 영롱한 아이들의 눈동자가, 저 연약한 여자가, 방금 지어낸 아내의 웃음이 나에겐 하나님이고 예수이고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봉사자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식사를 마치고 곧 통성기도를 한자리에 모여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방언과 흐느끼는 울음들이 한동안 나의 기도를 방해했다. "나는 지금 이상한 곳에 와 있구나" "내가 왜 이런 곳에 와서 기도를 해야 하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광장이 보인다... 불의와 거짓된 것들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행진이 이어졌다. 그 불끈 쥔 저들의 두 주먹이 진정한 기도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깊은 고요가 내 안에 흐르고 아내의 얼굴과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나간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었다. 힘들었던 날들이, 나의 헐벗은 삶이, 나의 발걸음이 새겨지고 있었다. 화산처럼 폭발하는 그 어떤 뜨거움이 느껴졌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울고 있다... 누구에게나 힘든 시간은 있다. 유독 나만 특별한 고난과 역경이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 건 누구에게나 있는 거니까.
한참이 지난 후에 알았다. 만지는 하나님의 손길을... 내가 울고 있을 때 나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하고 있는 하나님을...
그 어떤 말보다도 감각적인 하나님의 위로와 포근함이 나의 마음속 살결을 어루만지고 있음을... 괜찮아, 괜찮아... 하나님이 위로하고 있었다.
나는 믿는다. 나를 믿는 아내와 아이들을. 그들이 믿는 참 좋으신 하나님을.
12. 평안의 시간
교육생들의 표정은 전보다 환해졌다. 베데스다 기도원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을 보았다. 봄이 또 가는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만남과 이별이 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고의적인 헤어짐을 선택하기도 한다. 나름대로 의미를 지닌다.
세상이 들은 보이는 외형으로 사람을 가늠한다.
보이는 재력과 명예, 사회적 위치, 학력 등으로 구분한다. 움츠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생긴다. 자본주의, 학력주의의 사회는 등급이 매겨진다. 그러한 구분은 신이 지시하거나 계획한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과는 별개로 인간은 다른 세계를 역 창조했다. 보다 나은 삶이란 결국 사회적 성공의 성취 여부로 판가름된다.
한국 사회는 너무나 험난한 사회라는 걸 안다.
성경을 통해 듣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본다. 그것은 마지막 희망이다. 낮은 자들은 에덴을 꿈꾼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신다.
정말 성공적인 삶이 무엇인가 묻는다. 자신을 만드시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는 삶이다.
세상에 오염되어 자기 자신의 주인을 모르고 사는 삶이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자식이 부모를 몰라보는 경우와 똑같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인간적 귀천 없이 하나님 앞에 동일한 인격체로서 인간의 삶은 평화로워야 한다.
나는 고민한다. 도대체 어떤 모습이 진실한 나의 모습인가.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인지하지 못하는 나를 재발견한다. 세상이 주는 평안과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구분해본다.
풍족한 삶을 꿈꾸기도 한다. 육체의 정욕에 이끌리는 내 마음을 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거룩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회개는 자백과는 다른 삶의 실천이다. 말로 끝나고 눈물로 메꾸는 죄의 고백만은 아니다. 나는 진정한 회개가 필요하다.
난 별로 변한 게 없다.
아직 나는 내 안에 뿌려져 있는 하나님의 씨앗도 하나님의 근저(根底)에도 다가서지 못했다.
슬픈 일이겠지만 어떤 직감이 온다.
하나님, 내게 시간을 좀 더 주세요.
13. 치유와 회복
하나님과 만나는 여행이 이어진다. 오늘은 치유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식었던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단순한 신앙의 회복뿐만이 아닌 가정의 회복이었다. 나의 회복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치유하는 하나님이시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많은 기적을 통하여 우리의 삶 속에 분명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다. 많은 기도가 답변받지 못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계속 기도해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 하신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응답받지 못하는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은 새로운 방법으로 나의 삶 속에 역사하고 계심을 믿는 순수한 마음을 결코 잃어버려선 안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일은 이 땅의 크리스천들이 부여받은 사명인 것이다. 예수님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였고 순종하였다. 순종 없이 고난의 동참 없이 바라는 것들을 구할 수 없다. 이루어지지 않는 간구 속에서도 믿음과 소망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치유함을 경험한다. 내적 충만이고 내적 평안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다.
믿는 자만이 순종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믿지 않고서 순종하지 않고서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시고 복을 주시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그러한 하나님에게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믿음으로써 나아갈 뿐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올바로 세워져야 한다.
가정이 살고 더 나아가 사회가 산다. 사회의 병든 곳이 많다. 각종 부조리와 부패함이 만연하다.
모든 것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이다.
평강과 평화가 임할 것이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 아멘"(요한계시록 22장 20~2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