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 풀잎

날것

by 라윤영

그 자리 풀잎



/라윤영



잔잔한 하늘빛을 망쳐놓으려고

큰 바람이 저곳에서 왔다

찢어진 목소리처럼 괴로운 지상의 이야기를

묵묵히 견뎌온 저 하늘

어린아이의 편지가 저장되어 있고

철 지난 계절의 이야기는 구름으로 덮여 있다


몸을 가리기엔 세상 옷은 너무 크거나 작아서

가끔 얼굴이 빨개진다

출발해버린 열차의 꽁무니를 바라보듯

모든 뒷모습은 아프거나 쓸쓸하다


아파트 화단에 있던 거미집이 붕괴되었다

한동안 거주하며 자리 잡고 살았던

거미 두 마리 철거된 집터 한쪽 웅크려있다


시간이 멈추고

없었던 기억으로

재개발지구의 빈 집처럼 있던 것들이 없어진다


가장 낮은 곳

화단 한편 해맑게 웃는 초록

간지럽게 속삭이던 풀잎의 함성 들려온다

낮은 곳에 머물러서

더는 낮아질 수 없어서

저 바람이 두렵지 않은

그 자리

풀잎이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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