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입술

by 라윤영

「어떤 입술」




들어갈 수 없는 문이 있었네

골목 지퍼를 잠그고

조용한 밤이 걸어가네

문을 열어줄래?

방 안엔 오래된 그림들이

집을 나간 애인을 기다리듯

벽 속 시간은 고요히

그림자는 모두 지나간 말

벽 속에 문장을 만들고

다시 짓는 빈집

기억이 할퀸 손톱은

풀잎 푸른 입술로

또다시 파르르

발음하는 어떤 입술

비밀의 혀를 숨기고서

-라윤영 시집 【어떤 입술】(2018, 애지) 중에서.


숱한 경계와 관문이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그런 존재의 압박은 자기 존재의 부재를 경험하게 만들기도 한다. 입술은 원초적이고 리비도( libido)적인 통로이다. 그러한 통로를 통해 내재된 욕망은 비로소 그로테스크(grotesque)한 꿈을 깨우고 현실화된다. 그러나 그런 입술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면 , 이 세상에 없는 곳이라면 절망할 수 있다.
삶의 길이 탄탄대로의 펼쳐질 수만은 없다. 구부러지고 휘어지고 보이지 않는 곳을 가야 하는 길이라면 더 이상 길이 아닌 벽이다. 그림자조차 통과할 수 없는 막힌 길 위에서 화자는 묻고 있다. 그러나 쉽게 문은 열리지 않는다. 막힌 질문이다.
인간으로서 불화와 거듭되는 단절은 결국 어찌할 수 없는 자를 폐쇄된 길로 인도한다. 화자는 지퍼를 잠근 골목의 막다른 길로 향할 수밖에 없는 한계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퍼소나(pesona)는 여기에 굴하지 않는다.
화자의 삶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는 그림자는 들추어내고 싶지 않았던 상처라 할지라도 그러한 그림자를 모두 지나간 말로 규정하며 현실을 타파하여 새롭게 나아가는 도구로 삼는다. 그림자를 긴급 투입하여 현실에 부재하는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사방으로 벽으로 협착된 밀폐된 공간에서 벽 속에 문장을 만들고 다시 짓는 빈집으로 그동안의 상실을 메꾸고자 한다.
그것은 당연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던 내부 곳곳에 파편으로 박혀 고통받았던 통증의 치유이자 니힐리즘의 극복으로서 당당히 자기를 초월하고자 하는 자유의지를 현실화시킨다.
허물어졌던 공간의 재건축을 통하여 모든 것을 회복한다. 그러나, 비밀스러운 혀를 끝내 내보이지 않는다. 그 혀는 그가 가진 유일한 기밀로써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어야 할 전부인 까닭이다. 나는 지금 보고 듣는다.

" 풀잎 푸른 입술로

또다시 파르르

발음하는 어떤 입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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