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돌 나의 즐거운 숙녀가 무미건조하게 웃는다."라고 피카소는 1936년 3월 24일에 말했다. "고통의 비밀스러운 날씬한 체류"처럼 그의 웃음은 다소 가볍게 다가온다. 어딘지 모르게 그의 언어적 유희는 그에게 한정되어있는 그만의 언어로 착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조금 고독한 척하고 있지만 사실 그에게 문학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절실한 자기애의 발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형태의 표현이든지 자기만족을 이룰 때 무미건조한 주변인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꽃은 모든 걸 준다. 그런데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일수록 접촉은 쉽지 않다. 까다로운 고개를 오를수록 아름다울 수 있다. 그곳에서 아름다움에 자멸하고 몹쓸 본능에 굴욕 하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어떤 말이든지 그것이 문자든 음성이든 관계없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 인간 상식에 근거한 따분하고 쉬운 고정관념으로 상징화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오독과 난독이라는 장애물을 접촉하게 된다.
상징으로부터의 자유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거나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 고정의 틀을 깨뜨릴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설령, 이해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개의 짖음이나 질척한 땅바닥과 충돌하는 물방울의 비명 등등에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자유로운 독자적 해석이다. 다시 말해 어떤 평론가도 규정할 수 없는 다의성이다. 한 편의 시는 여러 가지 시로 다가서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자기만족을 이루는 것에 그치지 않는 확장된 행복이다. 근접하는 여자가 사랑이라고 말할 때 비로소 사랑은 시작된다. 시작이란 의미는 얼마나 자신을 황홀하게 만드는가.
나는 인간 존재의 근원이자 시작을 엉덩이에 둔다. 이 세상엔 이 시간에도 수많은 엉덩이가 거주지를 찾아 배회하고 있다. 곧 사라질 운명에 고개 숙인다 할지라도 나는 사랑한다.
사라진 엉덩이
전봇대 두 팔을 벌린다
화단의 꽃은
벌에게 나비에게
헤픈 몸을 허락한다
몸을 주는 게 아니야
그럼 뭘 주지?
모든 것
모든 것 안에는 모든 것들이 들어있다
보수공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다시 고치며 친절하게 걸어가는
먼지의 발은 가볍다
모든 가벼움은 멀리 있다
애인을 만나 욕을 먹고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철없는 계절들은 저기에
늦은 아침을 만나고
역전 의자에 내려앉은 먼지처럼
엉덩이들의 자리는 어디였지?
열차들이 행선지 없는 곳으로 떠나고
잃어버린 자리들은
모두 역전의 엉덩이가 된다
기억이 사라지듯
사람이 사라지고
전봇대의 팔이 움켜쥔 그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잠시 뒤,
엉덩이들이 사라졌다
(라윤영 시집 어떤 입술 "사라진 엉덩이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