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 실습 4탄 _ 명사 말고 형용사
경찰서 실습 2주 동안 5개의 부서를 돌아다니면서 분위기를 익힌다. 다른 기업들처럼 인턴의 개념이 아니다. 2주 동안 분위기를 익히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대로 서류를 복사할 수도 없고 실직적인 업무에 참여할 수도 없다. 여전히 이 시간은 어렵다.
나도 경찰 생활을 하기 전에 짧게나마 인턴을 해본 적이 있다. 무엇을 하든 좌불안석이다. 차라리 청소라도, 복사라도 하면 좋겠는데 섣불리 무엇을 하기가 어렵다. 막 들어온 신입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선배님들에게 방해나 안 가게 조용히 있으면 평균 이상은 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도중 민원인이 찾아왔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셨고 특정 단어만 반복하셨다. 나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역시 경험이 많으신 형사님께서는 계속 되묻고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캐치하셨다. 여러 가지 방향으로 질문을 하시고, 결국에는 어떠한 방향으로 해결하라고 도움을 드리는 모습을 보았다.
경찰은 생각보다 여러 능력이 요구된다. 민원인의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아이부터 시작해서 어르신까지.. 보통의 경우에는 의사소통을 하는데에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나이가 정말 어린아이들이라던가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분들과의 대화에서는 어떠한 말을 하려고 하는지 캐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의 경우에는 아는 단어도 한정되어 있고 뇌리에 박힌 장면만 기억하기 때문에 다방향의 사고가 어렵다. 그렇기에 그 말속에서 어떠한 말을 하려 하는지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다.
수사에 참여하면서 피의자든 피해자든 원하는 답을 끌어내야 한다. 또한 민원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답을 끌어낼 수 있는 질문을 해야 한다. 질문하나가 흐름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질문은 사실관계 파악에서 그치지만 고수들의 질문은 마음을 움직여 그 이상까지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피조사자가 삼천포로 빠질 수도 있고 그 상황 속에서 조사자는 객관적 사실에 의거해 그 이상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 것도 능력이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인력도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질문으로 답을 끌어내는 능력이 잠자코 경험이 쌓이면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우리는 경험이 쌓였든 안 쌓였든 국민 입장에서는 똑같은 경찰관으로 보인다. 따라서 단 한 사람의 억울함이 없게 하기 위하여 경찰관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경험도 중요하지만 최대한 선배들이 하는 것들을 많이 보고 듣고 배우고, 답변을 이끌어낼 수 있는 독서를 하고, 관련 서적을 읽어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경찰관이라는 직업은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이다. 여느 회사처럼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 수습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단 한순간의 실수도 , 멍청한 질문도 , 답을 끌어내지 못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탁월한 답을 이끌어내는' 경찰.
경찰서 실습 중 나에게 어떤 경찰관이 될 것인지 하나의 과제로 남았다.
어린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명사로 대답한다. 의사, 선생님, 경찰, 과학자.. 그런데 스무 살이 넘으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연 스러 앞에 형용사를 붙인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의사'라든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과학자'처럼 무언가 설명이 앞에 붙는다.
형용사는 내가 꿈에 대해 어떤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에 큰 가치를 두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똑같은 명사라도 사람에 따라 수백, 수천 가지의 다른 형용사를 붙인다. 똑같은 의사라도 누군가는 세계적으로 의학 발전에 기여하는 의사를 꿈꾸고, 누군가는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어린이를 살리는 의사가 되기를 희망한다. 또 어떤 의사는 커다란 빌딩에 의사 50명을 고용한 대형 병원의 병원장이 되고 싶어 한다. 명사는 같지만 '가치관'을 담는 형용사에 따라 삶의 형태와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꿈이 진화해가는 과정에서 명사는 잘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형용사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드림온>의 저자 김미경 씨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서른한 살 초보 강사였을 때 앞에 붙였던 간절한 형용사가 있다. '시간당 15만 원 받는'이었다. 당시 나는 시간당 5만 원 받는 강사였기 때문에 빨리 경력을 쌓아서 15만 원 받는 강사가 되는 게 소원이었다. 그러다 서른다섯쯤 되자 형용사가 바뀌었다. '책 한 권 출간한'강사로.
그렇게 지난 20년간 내 형용사는 수없이 변화해왔다. 그런데 형용사가 무르익으면 명사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강사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이라는 형용사를 갖게 됐고 그 방향으로 노력했다. 그러자 아트스피치 연구원 원장이라는 명사도 새로 생겼고, 방송인, 베스트셀러 저자라는 명사도 생겼다. 강사라는 기본 명사 외에 다양한 브랜드를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명사는 꿈이 진화할수록 분화하는 속성이 있다.
형용사를 향해 달려갔으면 다른 형용사를 꿈꿀 수도 있지만 그때는 아마 명사가 바뀔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