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영원한 그리움,
'우리'

페터 한트케『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를 읽고..

by 마음의 고고학

가까운 존재와 멀어질 때, 그 여백의 깊이는 헤아릴 길 없다. 그 존재와 멀어진 그 자리엔, 허허(虛虛)한 바람만 불 뿐이다. 그 존재 덕에, 눈부셨던 나의 작은 뜰. 맑은 하늘과 따스한 햇살이 반겨주던 나의 작은 뜰은, 이제 허허(虛虛) 바람 부는 창백한 빈 터일 뿐이다. 홀로 남아 있는 빈터, 조금 낯설다.



@ 페터 한트케 소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자기 존재의 상실감과 이를 극복해 나가는 여정을 다루는 소설이다.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 주인공 ‘나’는 아내 유디트에게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를 받는다. 주인공은 아내가 불현듯 떠나며 남긴 깊은 여백을 긴 여행길을 통해 매꾸려 한다.



“아주 어릴 적 이후로 혼잣말을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 소설은 유디트의 자취를 찾아 떠나는 긴 여행길을, 주인공 ‘나’의 독백으로 채운다. 이 독백은 지독히 고독하다. 독백을 통해 발설되는 기억의 편린들과 결핍은 인적 없는 추운 겨울 바다를 연상시킨다. 독백은 주로 과거 아내와의 추억에 대한 회상으로 물들어있다. 아내에 대한 미운 혹은 슬픈 기억. 미안하고 고마웠던 기억. 복잡스럽게 뒤엉킨 이 기억 속에서, 주인공은 끊임없이 기억들과 대화를 나누며, 결핍된 마음을 애써 기억 속의 아내로 채워보려 한다. 왜냐하면 아내의 빈자리는 “내” 존재의 결핍이기 때문이다.



@ 특별히 이 회상은 주인공이 처음 가보는 낯선 장소와 한 궤를 이루며, 주인공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이끈다. 아내에 의탁하던 과거의 ‘나’와 낯선 장소에서 마주하는 새로운 ‘나’가 계속 교차하며 주인공 내면의 풍경을 뒤 덮는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계속해서 주도권 싸움을 한다. 이 진동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존재 안의 낯선 존재, 곧 자아 속의 타자를 어렴풋이 발견하게 된다. 그 타자는 아무래도 과거의 ‘나’가 인정하기 싫은 ‘아내의 빈자리’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아내가 아닌 ‘진정한 내 자신’일 수도 있다.



@ 그런데 역설적으로 주인공 ‘나’는 이 불쾌한 내면의 불협화음 덕분에, 자기 안의 타자와 화해하게 된다. 그간 관심 가져주지 못한 과거의 존재와 화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내라는 존재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제 진정한 ‘나’로써 독립하게 된다. 이제 아내의 기억이 ‘내’가 아닌, 나 그 자체로써의 ‘나’말이다. 그리고 자기 안의 타자를 발견한 주인공은, 결국 ‘너와 나’는 갈라진 존재가 아닌 ‘우리’라는 깨달음으로 상승한다. 내 안의 자아와 타자 간의 갈등은 결국 ‘우리’라는 공존으로 가기 위한 발판이었음을.



@ 때론 우리도 ‘너’에게 ‘나’를 의탁하며 나 자신을 잊고 살아갈 때가 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그렇다. 그게 사랑이건 우정이건, ‘너’의 존재가 내 일부가 되고, ‘나’의 존재가 너의 일부인 것처럼. 그러다 이 관계가 멀어지면, 너가 내 자아에 남겨놓은 일부분 때문에, 내 진정한 존재가 낯선 ‘타자’로 여겨질 때가 있다. 그때 내 존재의 기반이 흔들려버린다. 너와의 기억이 진정한 ‘내’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결코 ‘너’는 ‘나’일 수 없다. 나의 작은 뜰을 비추는 따스한 햇살과 하늘이 설령 ‘너’일 순 있겠지만, 이 뜰은 결코 ‘너’일 수 없다. 나를 너로 착각하는 순간, 너도 나도 서로 희미해질 뿐이다.



@ 이제 남는 건, ‘너와 나’는 ‘우리’라는 사실 뿐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 서로 작은 뜰을 꾸며주자. 우리 서로 따스한 햇살이 되고, 푸른 하늘이 되어 주자. 서로 작은 들꽃이 되어주면 더욱 좋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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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페터 한트케의 글은 읽기가 정말 어렵다. 번역투 때문이라기보단, 오스트리아 문학의 특이성 때문인 것 같다. 내면의 서사를 끊임없이 수다스럽게 독백의 형식으로 끌고 가며, 독자들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든다. 대체 이야기의 출구가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우리 내 삶의 문제도 그렇지 않은가. 우린 삶의 기로 앞에서, 끊임없이 헤매고 착각한다.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 모두는 '출구 없는 삶의 울타리' 안에서 정처 없이 헤매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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