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사양』: 다자이 오사무의 '삶에 대한 실험'
2차 대전 패전 후, 일본 내 귀족계급은 급속도로 몰락해간다. 그동안 외부 세계와 차단 된 채, 유유자적한 삶을 누려오던 가즈코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현실은 너무나도 잔인하다. 귀족 출신으로 세상과 독립된 무균실 속에 지내오던 이들에게, 당연 문제될 것 없었던 ‘의식주’ 문제가, 이젠 당장에 가장 큰 문제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들에겐 이제 귀족적 우아함이 아닌, 생에 대한 절실한 투지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어머니는 귀족적 품위를 잃지 않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무력감 속에서, 서서히 그녀의 어머니는 내면의 깊은 동굴로 후퇴하며, 죽음에 가까워진다.
“나는 확신하련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 생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어떠한 희망도 없이 버려진 가즈코가 몸부림치며 살아남고자 외친 처절한 절규이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를 힘겹게 보내고, 또 남동생의 갑작스런 자살에도, 가즈코는 역설적으로 생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체험한다. 이는 ‘사랑’만이 자신을 살릴 수 있고, 또 살게 할 것이란 굳은 확신에서 나온 체험이다. 분명 첫사랑을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즈코는 또 다시 아픈 사랑에 자신을 내어맡긴다. 분명 가즈코에게 사랑은 아픈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사랑만이 그녀를 가슴 설레게 하고 생에 대한 의지를 강렬히 타오르게 할 뿐이다.
@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사양』은 패전 후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진 일본의 시대상을 비춘 소설이다. 승승장구하던 위대한 시대는 저물고, 죽음과 허무 그리고 공허만이 가득한 시대 속에서, 방황하던 작가 자신이, 삶의 희망을 찾고자 시도한 작품. 한마디로 ‘사양’이란 다자이 오사무의 ‘실험실’이다. 작가 스스로 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던 점에 있어서, ‘가즈코’라는 작중 인물은 작가 자신의 불안한 삶을 위로하고자 애쓴 ‘실험적 인물’인 것이다.
@ 패전 후, 폭파된 건물과 몰락한 귀족들 그리고 허물어진 구시대적 관습과 도덕은 ‘정신적 공허함’을 남긴다. 이 공허함에 몸서리치며 희망을 찾고자 실험했던 다자이 오사무는, ‘가즈코’의 입을 빌려 힘겹게 고백한다.
“사랑이라 썼더니, 그 다음은, 아무 말도 쓸 수 없게 됐다..”
다자이 오사무는 이 실험에서, 기존의 도덕을 부수고, 새로운 윤리를 창조한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이유가 없으며, 사랑엔 더 이상 보탤 것도 없으며, 더욱이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에.
@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것일까. 그는 결국 서른 아홉의 나이로 자살을 한다. 그가 실험한 인물, 바로 ‘가즈코’만이 현재 우리 곁에 현존할 뿐이다. 생의 투사인 가즈코는 다자이 오사무의 삶과는 정반대 인물이지만, 오사무 스스로의 삶에 진정 내리고 싶었던 결론인지도 모르겠다. 실제 그의 삶에서 사랑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가 남긴 가즈코란 인물을 통해선, 사랑의 혁명이 승리했다.
@ 삶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것 같을 때, 어떠한 희망도 없고, 기대도 없을 때, ‘사랑’은 비약적으로 우리 생의 의지를 부추긴다. 살아갈 이유가 없는 그 순간에도, 사랑은 ‘어떠한 이유 없이’ 우리를 삶의 현장으로 등 떠민다. 그리고 허무에 빠져 낙담하더라도, 사랑은 어떤 특별함 없이 우리를 설레게 만든다. 사랑이 없으면, 우린 아무 것도 아닌 존재다. 우린 다자이 오사무와 다르게, 사랑의 혁명에서 승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