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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고고학 Nov 11. 2022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영화 「버닝(Burning)」

무리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이창동 감독의 미스테리 영화 「버닝(Burning)」은 다양한 메타포들을 통해 ‘헛된 자유 무엇인지 시사한다. “ 그렇게 복잡스럽게 사세요. 인생을 즐기세요. 가슴에 바운스를 느끼세요.”라는 벤의  마디는 세상살이에 치여 허덕이는 우리들에게 ‘자유 관한 어떠한 혜안을 주는 듯하다.


거기에 옳고 그른  없어요. 자연의 도덕만 있지. 자연의 도덕이란 동시 존재 같은 거예요.”


벤이 말하는 자연의 도덕이란 변화무쌍한 자연의 모습에서   있듯, 어떠한 절대적 가치도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가치 기준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자연의 도덕이란 오직 ‘생존 위한 것이면 무엇이든 정당화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벤의 세계관에선 자신의 기괴한 취미마저도 정당화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권태로운 삶을 달래기 위한 것이면  어떠한 것도 가능하다는 차원에서, 벤에게 ‘재미 자체가 바로 ‘자유이기도 하다. 재미를 위해선 어떠한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무엇이든    있다는 바로  자유.  


@ 그러나 삶에 있어서 맞닥뜨릴  있는 모든 문제들을 뒤로 재껴 놓은  ‘오직 재미만 좇는 벤의 삶의 태도는 조금 미심쩍어 보인다. 벤이 추구하는 ‘재미 평범한 이들이 누릴  없는 것이자 오직 정해진 이들만 누릴  있는 특권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재미는 아무래도 어떠한 고생 없이 저절로 얻어진 부유한  속에서 때때로 찾아오는 권태로움을 달래기 위한 원초적인 쾌락이지 않을까. 이와 반면에, 종수는 벤이 누리는 자유를 즐길  없다. 불우한 가정형편 속에서 자란 종수에겐 벤이 누리는 재미와 자유는 자신이 절대로 도달할  없는 영역인 것이다. 그런데 해미는 절로 얻어진 부유함 속에서 나오는 벤의 여유로운 모습에서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해미는 나체의 상태로 아프리카 부족의 춤을 통해  자유를 표현한다. 그런데 해미도 어느 순간 벤이 지겨워하는 권태로운 삶의 일부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을까. 해미는 결국 특권화  ‘재미’,  권태로운 삶을 달래기 위한 벤의 기괴한 취미에 희생되어 버린다.  


@ “오늘을 즐겨라.”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당연히 갈망하는 것이 아닐  없다. 그러나 ‘온전한 재미나 기쁨 우리  평범한 이들이 쉽게 얻어질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치열한 삶의 전쟁터에서 하루하루 버텨나가느라, 재미와 자유를 잊은지 오래이다. 그래서인지 의식주뿐만 아니라 어쩌면 삶을 향유하는 정신적 가치들마저도 계급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영화는 오늘날 보이지 않는 계급주의를 여러 메타포들을 통해서 고발한다.  


@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벤은 해미의 행방불명으로 불안에 떠는 종수에게 갑작스러운 질문을 한다. “   쓰세요?”. 종수는 “세상이 너무나도 복잡스러워서요.”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벤은 “ 그렇게 복잡스럽게 사세요. 인생을 즐기세요. 가슴에 바운스를 느끼세요.”라고 대답한다.  다음, 영화는 종수가 글을 쓰는 장면으로 뒤바뀐다. 세상의 복잡스러움,  자연의 도덕률을 인정해서일까. 종수는 살기를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종수는 끝내 벤을 죽이게 된다. 해미와 마찬가지로 종수도  앞에서 옷을 벗는다. 그러나 종수는 해미와 달리  옷을 벤의 차에 집어넣은   차를 불태워버린다. 종수가 자신의 옷과 벤의 차를 불태운 이유는 자신이 벤으로부터 잠시나마 꿈꿨던 자유가 허상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벤이 자신의 권태로운 삶을 달래기 위해 버려진 비닐하우스들을 불태웠다면, 종수는 자신의 진정한 삶을 찾기 위해  헛된 자유,  벤이라는 헛간을 불태우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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