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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고고학 Feb 25. 2023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읽어보기.

나혜석 선생의 '경희', ‘신생활에 들면서' 그리고 ‘구미 여성을 보고'

친구가 보내준 짤막한 글을 읽게 됐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다보니 쉽지 않았다.

작가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떤 배경지식 없이 읽다 보니, 읽는 것이 참 더뎠다.


엄마를 하늘로 떠나보내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려, 로마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친구는 이 긴 비행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으면 한다며, 짤막한 글들을 보내줬다.


캄캄한 기내 조명 속에서, 다들 숨 죽이고선 무엇인가 재밌는 영상을 보는 통속에, 또 온통 잠 속에 빠져 있는 틈 속에서, 상상력을 동원해가며, 사명감을 갖고선 아주 어렵게 한 문단씩 읽어 갔다. 그렇게 경희를 마치고, ‘신생활에 들면서’와 ‘구미 여성을 보고 반도여성에게’를 읽으니, 로마에 도착까지 여전히 9시간이 남았다. 남은 시간 내내, 나혜석이란 사람이 누굴까 굉장히 궁금했다. 속으로 여러 의문들을 품었다.


근대화를 겪으며 대한민국 최초 ‘신여성상’을 부르짖은 여성 투사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한편, 작가 이름이 중성적이라 그런지 작가가 남성인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며, 여성의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한 깨어있는 남성 작가인가? 생각도 했다.

 

가만 있다보니 이런 수다스런 사념들은 둘째치고, 작가가 이야기하고 구분하는 여성들의 다양한삶의 형태가 마음에서 떠올랐다. 당시  여성에게 자신의 고유한 인격과 특성이 존중되는 삶이 있었을까. 여성에게 있어선, 각각의 특성과 개성이 존중되기 보단, ‘여성이라는 보편적인 개념, 조금  구체화 되고,  특성화  , 아주 원초적인 차원에서, ‘생물학적 특성에만 국한된 개념 위에, 사회가 바라는 모습들을 붙인 채로, 수식되곤 하는.. 아이  낳고, 집안일 잘하고, 남편에게 내조 잘하는. 아주 동물적인 차원에서   그대로 이면서도,  역설적이게도 어떤 사회적 가치들이 요구된 채로, ‘여성이라하면, 아무렇지 않게, 아주 은밀하게, 평가되고 보여지는 것이리라.


나혜석이란 작가의 내막을 알았더라면,  글을 ‘아주 뻔한  읽었을  같다.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발자국 떨어진 , 저기  길게 늘어뜨려 기술한 진부한 여성관에 입각하여 말이지.

그런데 무엇보다 이 글을 읽으며, 누나가 참 많이 떠올랐다.


한 번도 여성으로 살아본 적도 없고, 감히 태어난 자리가 여성이고, 같이 커온 형제가 여성이라는 차원에서, 어설프게 누군가의 삶을 공감해봤다고 자처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는걸 계속 느끼지만... 차별은 은밀하게 감춰진 채 행해진다. 더욱이 가슴 아픈 현실은, 같은 처지의 사람끼리, 서로 은밀한 방식으로 차별한다는 것. 보이지 않는 차별들이 난무하고, 내밀한 방식으로 폭력이 교환되는 상황들 안에서,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커왔다. 크고 보니, 누나가 내게 참 많은 양보를 했다는 것을 조심스레 알게 됐다. 부모님이 안 계실 때, 괜히 내게 심술부리고, 못 살게 굴었던 것도, 그땐 이유 없이 투정부리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살다보니, 누나가 참 많은 희생을 해왔다.


여전히 사회 내 변두리에서, 행해질 은밀한 차별을 생각하면, 그저 무기력해진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눈앞에서 행해지는 ‘은밀한 차별’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채 흘러간다. 온전히 겪어본 자만이 알고, 당해본 자만이 알 뿐이다. 당한 사람이 이걸 겨우 겨우 용기내어 마음 속 바깥으로 표현해보려 하면, 괜히 엄한 사람 잡는다, 헛소리한다 소리 듣는게 현실이다. 이런 은밀한 차별들 속에서 살아남고자, 더 혹독해지는 것이 같은 여성들이라는 것이 더 가슴아픈 현실이다. 그들도 살아남으려고, 평범(?)이라는 있지도 않은 헛된 평균성을 만들며, 같은 여성들을 박해한다. 많이 알고 배우면, 이 혹독한 현실을 고스란히 알고 살아가는 것만큼 잔인한 것이 없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둔해질 것을 강권하고, 그것이 좋은 가치라 이야기한다.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여성은, 마치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마냥, 그 전과 후가 달라지기 때문에. 은밀한 차별임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이 분해지고 슬퍼진다. 그렇기에 모르는 척, 둔해지려 한다. 은밀한 차별 앞에서, 웃으며 넘어가야 한다. 괜히 찌푸리거나 꼬투리 잡으면, 화살은 내게 돌아오기 때문에. 괜히 사회를 개혁할 투사로 자처하려 하기보다, 차별의 주체들 틈바구니 속으로 도망치려 한다. 그것이 속편하기 때문에.


이 글을 읽고, 여러 망상들을 하며, 이 불편한 사실 앞에서, 이 은밀한 차별은 인간군상이라 핑계 댄다. '사람사는거 다 그렇지 뭐..' 너무 복잡스럽고, 답답하고 잔인한 현실이기에, '나만 피해보지 않으면 되는거 아닌가'라는 아주 자기보존적이며 동물적인 방법으로 그럴듯한 변명을 되내이며 도망친다. '나만 아프지 않으면 되지..' 비겁한 생각을 하며, 내 앞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차별들을 뒤로한 채, 눈을 감는다.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을 갖고, 한숨을 푹 내쉬고선

무기력하게 되내인다.


'언제 이런게 없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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