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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고고학 May 19. 2023

나는 그저 그런 사람, 아니 그냥 나쁜 사람이 될래

'나'로부터 자유

인간관계를 돌이켜 보건데, 가장 어려운 것은 나 자신과의 관계라는 것을 비로소 어렵게 깨닫게 되었다.

 

마음 속 사념 안에, 끊임없이 올라오는 불쾌한 혹은 불편한 감정들의 기원을 잘 돌이켜보면서,

그 기원은 '나'와 '내가 되고 싶은 나, 내가 생각한 나'와의 끊임없는 충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끊임없이 '나'에게, 어떤 모습의 '내'가 되도록 강요하는 움직임을 마음 안에서 엿보게 된다.

사사로운 것부터, 어떤 거창한 것에 이르기까지,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이 움직임은 마음 안에 스며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내가 '나'이고 싶어하는 어떤 모습을 은연 중에 나에게 강요한다.

이를 페르소나, 곧 사회적 가면이라 칭하며, 자연스러운 인간의 내적 자아의 한 형태라고 하지만,

이 형태는 둘째치고,

페르소나 이전에 더 근본적인 내 '자아'의 있는 그대로 모습은,

일상생활 안에서 너무나도 쉽게 무시되거나 생략되기 일쑤다.


본연의 자아에 대한 자동적인 생략 때문에,

'나'이지만 온전히 '나'로서, 있을 수 없는 이 역설이,

자연스레 발생한다.  


이중에 가장 본질적인 역설은,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좋은 사람이 될거야'라는 페르소나와

내 본연의 자아 간의 대결이 아닐까 싶다.


대충 관계의 태두리 안에서 보건데,

가정 안에서의, 친구들 안에서의, 직장 안에서의 내 모습들은

'개인적인 성향이나 취향'으로서 드러나기 일쑤다.


그러다 어떤 도덕적인 판단과 상황에 노출될 때,

다시 말해, 내 자아가 저런 사회적 관계 안에서 누군가로부터 '도덕적 판단'에 처해지게 될 때,

타인의 시선은 보다,

더 근본적으로 내 자신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도덕적 잣대가 더 뿌리 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남들의 시선 때문에, '어떤 척'하는 것을 떠나서,

보다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내가 '나'로서 바라는 어떤 이상적 자아에 의해

'척'하기가 자동적으로 실행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남들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어하는 것보다,

더 근원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의해, 내가 원하는 '나'가 되고 싶어하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더 크다는 것이다.


이는 쉽게 자유로워질 수 없다.

나는 완벽할 수 없음을 스스로 인지한다 하더라도,

내 스스로 정해놓은 기준치가 내 자아에 인이 박혀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적 자아의 모습은 단순히 이지적인 차원에서

내 행동의 지적/합리적 판단에 근거해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아에 대해선, 굉장히 입체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내 자아 안에는 뿌리깊게 이기적인 욕구나 동물적인 욕구도 상존하기 때문이다.

성욕/식욕 등 여러 욕구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내 이상적 자아와 끊임없이 충돌한다.

이는 현실을 살아가는 자아 이면에서 끊임없이 오고가는 자연적인 '운동'이랄까.

자연이 사계절을 겪으며 여러 조건 속에서 변화를 겪듯이,

내 자아도 마찬가지로 자연의 형태로 어떤 운동 변화를 겪는 듯 보인다.

나의 이기적인 혹은 동물적인 욕구와 나 자신과 끊임없는 협상 속에서,

자기합리화와 자기초월(주관으로부터 벗어나, 옳은 것을 선택하고자 하는 것)이 상충하는 가운데,

'내'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 모습을 겸허히 인정한다.

나는 욕심이 많고, 부족하고, 질투심도 있고,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있다.

나는 나쁜 사람이기도 하고, 죄인이기도 하다.

그래도 된다. 그래도 좋다.

그럼에도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애쓴다.

이것 또한 좋다.

 

때론 나는 비겁하고 겁쟁이 이기도 하다.

한편 나는 용감하고 대범하기도 하다.

그래도 좋다.


괜찮다. 나는 나쁜 사람이어도 좋다.

내가 나빠 봤자, 얼마나 나쁠 수 있겠는가.

누군가를 미워해도 좋다. 미운 감정을 갖고 있어도 좋다.  


애쓰는 나 자신에게 위로를 건넨다.


이런 성찰이 선행되지 않으면,

이유를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자기 혐오에 빠지거나, 나태함과 일상의 권태로움 속에 허덕이게 된다.

아니면

상황을 오해하거나 다른 사람과 주변 탓을 하면서

뼛속 깊이 열등감 속에 염세주의로 살 수밖에 없다.


'나'를 알아기가 참 쉽지 않다.

진정 '나'를 안다는 것은

보고 싶지 않은 나의 찌질함과 헛점, 이상화된 내 모습의 껍데기까지 벗겨야만 한다.

그 껍데기를 벗겼을 때,

누추하고 초라한 알몸이기보단

어떤 내적 자유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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