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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고고학 Jun 05. 2023

Beef(성난 사람들)에 대한 단상



정말 오랜만에 좋은 드라마를 봤다. 


평소에 드라마에 관심이 없었던터라, 처음엔 별 기대 없었지만, 시작부터 긴장감과 몰입감이 장난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 유학 중이기도 하고, 해외에서 몇 번 아주 잠깐씩 살았던 기억들 있기에,


인종차별에 대한 씬이 등장할 때, 나도 마찬가지로 주먹이 움켜쥐며 자연스레 드라마에 집중하게 됐다.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 작품의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내 느낌 위주로 단상을 적어보려 한다.


- 분노의 기원?


 '분노'의 기원은 어디일까? 감정의 요소들을 들여다 봤을 때, 분노는 여러 감정들 중 가장 기본적인 원자와 같은 근본감정일까? 아니면 다른 감정에서 비롯된 부수적인 감정일까? 이를테면, 분노는 수치심에 의해 발휘되는 부수적인 감정인걸까? 아니면 분노 그 자체가 발휘되는 근본 감정인 것일까?


 이 드라마는 '분노'의 기원에 대해, 주도면밀하게 살펴 들어간다. 이야기의 핵심 줄거리는 있지만, 그 줄거리 안의 다양한 요소들과 등장인물들을 통해, 주인공들이 대체 왜 '분노'하게 되었는지를 그들의 의식을 고고학적으로 탐구해들어간다. 


- 분노라는 실험실 속에서,


 이 작품은 주인공들의 피말리는 복수극이라는 실험을 통해, 결국 '분노'란 근본감정이기보단, 다른 감정에서 비롯된 '부수적인 감정'임을 밝혀낸다. 우리는 대개 누군가의 '분노'를 바라볼 때, 그 분노엔 어떤 이유와 사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분노의 주체가 정신이상자가 아닌 이상, 나름 합당한 이유로 그 분노가 유발되었을 것이라 추론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분노해도 된다는 합당한 이유와 근거는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이 목표하는 바를 명확히 수행하기 위해, 조금 더 범위를 좁혀 다시 질문을 해보자. 내 권리와 인격을 침해 받지 않는다는 차원과 더불어 불의의 상황을 눈앞에서 보게 됐다는 차원을 배제하고, 순전히 감정적인 영역에서, 누군가와 시비가 오갈 때, 분노해도 합당한 이유가 있을까? 오직 내 기분이 나빠서? 부모욕을 해서? 내게 모욕감을 줘서? 반대로 정신 이상자가 내게 그런 모욕스러운 말을 뱉었을 때, 우린 그닥 심적 동요 없이 그 상황을 피하려 도망치지 않는가? 


- 분노는 우발적인가? 아니면 철저히 계산된 것인가?


 분노라는 감정의 그 메커니즘을 보건데, 우리 안에 분노를 유발케 하는 어떤 '심적 트리거'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트리거는 철저히 내 안에서 계산된 채로 이행된다. 그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말이다. 이를테면, 정신이상자가 내게 모욕적인 언사를 했을 땐, 이 트리거가 발동되지 않는다. '굳이? 내 손에 똥을 묻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가족이 내게 조금만 불편한 이야기를 하면, 우린 아주 쉽게 벌컥 화를 낸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 분노를 받아줄 주체가 '안전하다?'라는 계산 때문일까? 어쨌든 우리의 분노 기재를 잘 살펴보면, 내 안에 '트리거'가 있고, 이는 외부의 요인에서 건드려지기보단, 내 안에서 선택되고 그 분노가 행해지는 것이다. 소위 '분노 유발자'라는 말은 이 논리라면 어폐가 있는 표현이다. 


 이 작품은, 이 분노의 실체를 아주 면밀히 분석해 들어가며, 주인공들의 분노 트리거의 이면을 파고들며, 개인과 사회, 반대로 사회와 개인 간의 관계 속에서 어떤 형태로 '분노'가 형성되는지 보여준다. 앞서 말했듯이, 분노는 근본감정이 아닌, 부차적인 감정이다. 더 원초적인 감정에 덧붙여져 행해지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개인의 철저한 선택에 의해 발휘되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이 '분노'는 굉장히 관계 안에서, 사회 안에서 치밀하게 계산된 채 행해진다. 갑질도 아무한테나 하지 않듯이, 누울자리 뻗을 곳인지 아닌지 그 철저한 계산 속에서 행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아주 은밀하게 시행된다. 형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이를 숨기기 위해서, 혹은 사업 파트너들 사이에 안에서 상대방이 궁지에 몰리자 평소 숨겨온 악감정을 그 찰나에 발휘하는 등. 이렇듯 '분노'는 우발적이기보단, 굉장히 치밀하고,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 은밀한 역학 안에서 오직 직감을 원리로 한 계산을 통해 발휘된다는 것이다. 


- 분노 이면엔, 가냘픈 내 영혼의 초상이 놓여있다. 


 이 작품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이 분노 기재를 뒤짚으면, 그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음을 제시한다. 이 작품은 얼핏 기생충의 오마주?가 아닐까 싶지만, 개인적으론 기생충은 문제제기에서 끝난 것이라면, 이 작품은 더 나아가서 보는 이로 하여금 성찰하게 만드는 그 어떠한 매력이 있다.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분노에서 오는 어떤 정체 모를 카타르시스에 의해, 복수심에 불타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고 하는 그 전쟁터에서, 주인공들은 갑작스럽게 각자 분노의 거울을 통해,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 내 눈 앞에 죽여버리고 싶은 저 원수만 없애 버리면, 곧장 마음의 평화가 올 것 같지만, 실은 분노는 왜곡된 자아의 발로인 것이다. 결국 자기를 분노케 한 그 사건과 상대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그 분노의 소굴로 들어 갔다는 것. 다시 말해 그 트리거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이 트리거의 이면에, 왜곡된 자아, 어둠에 가려졌던 자신의 그림자가 놓여있다. 상대방을 물리적으로 죽인다한들, 결국 진정한 원수는 내 내면 안에, 내가 직접 물리적으로 복수할 수도 죽일 수도 없는 내 영혼 한 모퉁이, 바로 어둠에 가려져 울고 있는 가냘픈 영혼의 초상인 것이다. 


- 분노를 바라보면, 결국 진정한 '내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결국 '분노' 안에 숨겨진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누군가에겐 분노는 '수치심'의 발로였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 분노는 '열등감'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각자 사연은 다르지만, 그 분노를 유발케하는 근본감정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나의 결핍을 발견할 수 있고, 그 결핍을 뒤집어보면, 내가 진정 받고 싶은 사랑, 내가 진정 누리고 싶은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실로 내 법적 권리가 위협되는 상황이 아니면, 혹은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질 때(살인/방화 등)가 아니라면, 한 개인 안에서 수도없이 치밀고 가라앉는 내적 분노의 사연은 결국 '나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는 영혼의 울부짖음일 수도 있는 것이다. 


- 분노와 혐오 사이


 이 '분노'를 조금 다른 맥락으로 가져와서, '혐오'로 바꿔보자면, 이해하기가 더 쉽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누군가를 혐오한다. '극혐'이라는 표현이 거의 일상용어로 자리잡았듯이, '혐오'가 너무나도 쉽게 만연해있다. 그 혐오의 발로를 가만 살펴보면, 결국 자기 자신이 숨기고 싶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자신의 혐오스러운 모습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누군가를 미워하기 이전에, 나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 우선.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분노하고, 혐오한다. 그 분노와 혐오에 대한 공감을 받고자,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근거없는 망상들이 떠돌아다니며, 여러 선동글들이 혼재해있다. 이 분노와 혐오에 대해, 사회학적으로 정말 객관적으로 면밀히 연구될 필요가 있겠지만, 이 연구 이전에, 우리들 모두 이 시대를 살아가며 직감적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기 너무 어려운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과학문명은 발달했을지 언정, 풍요로운 시대 속에 산다고 할지언정, 그 이면에 우리 모두 지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정신적으로 탈진한 상태를 어떻게서든 매우고자, 과하게 명품을 찾던지, 아니면 분노하거나 혐오를 통해 회피하려는 모습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잠시 어딘가로부터 쫓기는 마음, 두려운 마음을 쉼호흡을 통해, 내려놓고 내 마음을 살펴보자. 가장 울부짖고 서럽게 내팽겨쳐져있는 존재가 바로 내 존재일 수도 있다. 이걸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려거나, 쉬이 어떤 물질로 채우려하기보단, 우선 내 마음의 소리를 잘 들어주는게 우선일 것이다. 가장 꺼이꺼이 울고 싶은게 '나'인데, 그걸 분노로 표현해봤자, 진정한 '나'만이 더 소외될 뿐이기 때문이다. 


- 초월적인 무엇인가를 갈망하며..


 인류 역사 이례, 어떤 한 시대도 태평성대한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각 시대마다 고유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오늘날 우리 시대는 역설적으로 '세속화'의 문제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다. 가장 고도로 발전한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 공허하고, 무엇보다 영적으로 방황하는 이 시대 속에서, 세속화 이론을 통해, 현대 문제를 지적한 찰스테일러의 관점에 적극 동의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더 발전, 보다 더 진보'라기 보단, '자기 수행'일지도 모르겠다. 이또한 아무리 약물이 발전하여 정신의학 처방을 통해 극복하려 할지라도, '나 자신을 알아가는, 나를 돌보는 자기 수행'은 종교와 불가해소성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유튜브를 통해, 종종 부자들의 생활 습관 내지? 성공한 사람들의 루틴?이라는 주제의 영상들을 통해 '명상'이 그들의 핵심 루틴임을 알게 된다. 아무리 종교적인 색채를 뺀다한들, 명상을 통해, 나를 객관화하고 나를 돌아본다는 것은, 요즘말로 '메타인지 시선'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우선 나를 초월해서 나를 돌아본다는 것 자체가 종교적 수행이라 할 수 있다. 시대가 극단적으로 치달을 만큼 치닫았는지, 겉으론 '종교적 색채'가 없는 것처럼 말하지만, '명상과 수행'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해나가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실로 현대사회의 그 수많은 문제 안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세속화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결국 세상의 기원에 대한 문제고, 그 기원에 대한 물음은 철학을 넘어 종교적인 물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불가지론의 영역이라 한들, 혹은 이 세상의 존재는 몇 십억 분의 확률로 우발적으로 탄생한 세계라 한들, 우리 삶에 종교적인 부분이 지워지면 지워질수록, 이런 정신병리현상이 더 파다해질 것이라는 조심스런 생각을 해본다. 다소 이 단상에서의 결론이 비약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이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작품 후반부에 가면 갈수록, 감독은 종교적 색채를 가미시켜, 초월의 영역을 넘나들며, 주인공들의 내면을 치유해나간다는 것을.. 


단상이라 말해놓고선, 다소 글이 길었다. 두서없는 글에다, 둔설 그 자체다. 어차피 브런치 구독자가 별로 없기도 하고, 내 글은 그닥 어떤 가치가 없기에, 이렇게 편하게 글 쓸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 


급하게 글을 마무리해본다. 


시험기간만 아니면, 한 편 한 편, 풍부하게 여러 철학적 이론들로 분석하고 싶다만, 


이번 학기는 유학 첫 일 년을 마무리 짓는 가장 중요한 학기이기에,, 이 아쉬움은 가슴에 깊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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