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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흠 Jan 27. 2022

나에게 문학이란


최근 많은 평론가는 위로와 힐링으로 전락해버린 현 문학이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 되어야한다라거나 인식이 곧 위로라며 그럼에도 필요하다고 서로 옥신각신한다. 그러면서 거창한 이유들을 대는데 사실 난 잘 모르겠다. 그런 거창한 것들은 정의내리기 좋아하는 평론가들에게 맡기고 그저 나에게 문학이란 뭔가를 쓰고 싶었다.


나에게 문학이란 내게 유일하게 너그러웠던 사람이었다. 웬 의인화냐고 하겠지만 책보다 더 너그럽고 사려 깊고 섬세한 사람을 아직 실제로 만나보지 못했다. 그건 글에서만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글은 세밀하고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기 때문에 쓰는 순간만큼은 괜찮은 사람이 되거나 글 속에 등장하는 나는 실제의 나보다 더 크게 과장되기 때문에 실제의 내가 이기기 어렵다. 그런 사람을 만나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걸 수도 있다. 꾸며진 글일 수도 있지만, 책의 사려깊음과 이해심을 좋아한다.


내게 유일하게 너그러운 사랑을 보여준 건 책이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책을 왜 읽냐고 물어서였다. 더 적확하게 말하면 나에게 문학이란 뭐냐는 것이었다. 거참 나에게 어려운 질문을 내리꽂으니 그에 합당한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지적 허영심을 충족하기 위한이 아니라 더 구체적인 대답이 필요했다. 뭐라고 쓸까 고민하다가 예전에도 쓴 게 생각났다. 20살 초반에 쓴 글이었는데 저번처럼 메일함을 보다가 발견했다. 다음은 내가 20대 초반에 나에게 문학이란 제목으로 쓴 글인데 한 부분만 가져왔다.


[학원을 다니기로 했지만, 학원도 마찬가지였다. 아프고 외로운 데다가 늘 자정이 가까워서야 끝났다. 하지만 그때 행복을 처음 경험했다. 잠자리에 다리를 뻗고 누워 잠자기 전 나는 아직도 선명하고 뚜렷한 진정된 마음으로 행복을 느꼈다. 불행의 절정에 행복이 오는 역설적인 아이러니. 원초적인 것에 행복을 느끼며 정작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때 느꼈던 거 같다. 그 후 학원을 그만두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외로움이든 고통이든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파하고 흐느꼈다. 그것들에서 무감각해지기까지 했지만 멀리 가진 않았다. 그렇게 쭉 방탄하게 살았던 거 같다. 나는 학교에서나 집안에서나 방치되었고 버려진 채 살았다. 그게 그렇게 불행한 거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그것들이 모여 지금의 지금 나라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그런 순간들이 모여 오늘의 내가 있다. 하지만 오늘이 지난날에 또다시 그런 고통과 슬픔이 다가오면 언제든 나는 그것들을 부정하고 불안해하고 밀치며 절망할 것이다. 고통을 즐기면서 부정한다. 나는 그런 모순된 인간이다. 누군가 꼰대 짓 하는 걸 싫어하면서도 그 짓을 내가 하는 모순된 인간이며 남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나 또한 이해하지 않는 고집불통이며 무결점인 척 남들과 다르다고 하지만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불안해하고 나 자신을 버리고 남들에게 맞춰 사는 그런 인간이다. 이건 학창시절에 당하던 어떤 콤플렉스에 기인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것들에 벗어나고 싶다. 나에게 질문하는 인간이 되고 싶으며 나를 찾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아직도,성인이 된 지금도 글 쓰는 규칙보단 내 감각에 의존할 뿐이다. 내 수준은 유아기적이다. 하지만 꾸준히 생각한다. 이 생각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줄 것이란 건 믿는다. 내가 지금 느끼는 건 또는 추구하고자 하는 건 내가 살아있다는 걸,내 자신을 의식하는 걸 느끼기 위해 지향하고 있지만 나는 꾸준히 좌절한다. 내 우울증이 그러한 방해꾼일 것이다. 내가 태어난 이유에 대한 , 내게 주어진 것을 알기 위해선 내가 찾아간 건 책이었다.]


요새 가끔 저 글을 읽는데 읽을 때마다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때와 난 크게 달라지지 않은 거 같다. 살기 위해선 끊임없이 묻고 배워야 했다.


그렇다고 많이 읽었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우울함과 무기력이 책을 볼 여력조차 주지 않았다.


영화 디태치먼트에서 주인공이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하루 24시간 동안, 우리의 남은 삶 동안 그 권력은 열심히 작용하고 우리를 바보로 만들면서 죽음의 구렁텅이로 처박고 있어"


"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뇌 속의 사고방식을 무뎌지게 만들지 못하게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읽는 법을 터득해야 해."


나의 존재 이유가 무뎌지고 사라질 때 저 대사처럼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선 의심하고 생각해야 했다.


분명 모든 게 내가 쓸모하고 볼품없고 형편없는 인생이며 죽어야하는 존재에서 책은 탈출구이자 안식처였다.


내가 느끼는 책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보통 내가 아는 어떤 이를 묘사할 때 나는 내가 쓴 글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다. "아 얘가 이 정도로 매력있고 이 정도로 특별하진 않은데, 아, 이 정도는 아닌데"


이상하게 어떤 한 인물을 글로 묘사하고 풀다 보면 특별하지 않아 보였던 내 옆에 있던 사람도 특별하게 해 보인다. 이것처럼 문학은 볼품없는 것도 전혀 다르게 탄생한다.영화 아메리칸 뷰티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비닐봉지가 천천히 날리는 비디오를 보여주며 아름답지 않냐고 물어본다.


웬 비닐봉지 따위를 보며 아름답지 않냐고 물어보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 그 영화를 본 후 길을 지나가다 쓸데없이 날리는 비닐봉지마저 다시보게 해준다. 예술은 이런 기능을 해준다 .모든게 권태롭고 익숙해진 것들에서 예술은 전혀 새로운 걸 보여준다. 굳이 말하자면 의미를 붙여준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그걸 느끼기위해 예술을 향유한다. 나에게 문학이란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주고 관통하게 해준다.


거기다 영화는 머릿속에서만 상상하던 그림을 시각적으로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좋아한다.


이상하게 나는 어떤 책을 읽고 맥이 빠질 때가 있는데 작가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다. 그렇게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살아가게 해준 작가가 자살로써 죽어버린다면 힘이 빠진다. 더는 좋은 책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살한 작가의 책을 높이 추앙하지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 문학은 삶에 숨통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었기 때문에 제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작가 자신이 그러지 못하면 나는 좋은 책에서 그냥 책으로 내려간다. 어떤 책이라고 말하진 못하지만 어떤 책에서 삶은 구렁텅이 같고 자신은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묘사했을 때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구나, 나와 똑같구나 나같은 사람이 있구나라는 공감과 동질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좋은 책이지만 글쎄 난 그 책이 그렇게 높이 추앙할 만큼의 책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보여주었기에 문학으로서는 충분히 가치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삶이 보잘것없고 거지 같고 쓰레기 같다고 묘사하지만 그런데도 살아남은 작가의 책을 좋아한다. 그게 나에게 크나큰 위안을 준다.


다시 말하자면 나에게 좋은 책이란 끝까지 살아남은 작가가 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맞닿아 감응하게 해주는 책이다. 위로 향할땐 칼이 되고 아래로 향할 땐 조명이 되어주는 글을 애정한다.


이제 나는 이걸 돌려주고 싶다. 내가 문학으로 받은 걸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그러기위해선 나는 끊임없이 살아남아야한다. 나는 살아있고 살아가고 살아남기위해서 문학이라는 핑계를 가지고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살아남음이 다른이들에게 위안이 됐으면 좋겠다.


각자에게 문학이란 저마다 다르지만 나에게 문학이란 별거 없이 그냥 이런 것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살아야하는 이유를 되새겨주는 것, 그리고 그걸 돌려줘야하는 걸 알게해주는 것. 나에게 문학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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