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이사갑니다

by 손상준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저는 제 첫 자취방을 떠나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에 채워나가기만 했던 시간들이 끝나고 비워내야 할 시간이 기꺼이 찾아온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저에게 비움은 참 어려웠습니다.


어린 시절, 해가 바뀔 때마다 항상 부모님의 명령 아닌 명령으로 형과 저는 옷장 정리를 해야 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아쉬운 마음에 옷장에 들어있던 모든 옷들을 모조리 다시 꺼내어 입어보며 이미 팔다리가 짧아진 옷들조차 한 움큼 안아 들며 버리길 주저하곤 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항상 고집을 부리던 저를 보고 언젠가 부모님께서 '추억과 미련을 구분하라' 하였던 말이 떠오릅니다. 끝내 눈물을 찔끔 흘리며 추억이라 생각했던 헌 옷들을 한 움큼 버리고 나서야만 부모님은 다시 옷장을 예쁜 새 옷들로 채워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머리가 커지며 처음으로 독립을 하게 된 이 아이는 결국 다시 의미를 부여하고 추억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한 움큼 꽉 쥐며 살아가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무엇이 추억이고 미련인지는 이제 본인만이 알고 있습니다.



하필이면 책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애석하게도 굳이 두껍지만 의외로 술술 읽히는 장편 소설 같은 그런 책들 말입니다. 또한 전부 읽지는 않더라도 가지고 있는 것에서 편안함을 주는 책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외의 것들도 많습니다.

지인에게 선물당한 따분한 자기 계발서, 한 번 읽다 흥미가 떨어져 두 번 다시 펼쳐보지 않았던 경제서, 먼지 쌓인 전공 서적들로 자그마한 원룸 방이 가득 차버렸습니다.


미루고 주저하다 결국 이사 단계의 막바지가 되어서야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바구니를 집어 들어서 담아내기 시작합니다.


중고 나눔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두 번 다시 펼쳐보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던 책들도 노란 분리수거 바구니에 담기면 묘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거운 책들을 반드시 비워내야만 이사가 수월해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끝내 분리수거장에 도착합니다.


그 자리에서도 몇몇 권은 다시 펼쳐보며 고민합니다. 그러고는 결국 제가 가장 좋아했던 책을 제일 위로 오름차순으로 올려두고는 비 맞지 않는 구석에 예쁘게 밀어 두고 떠납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지나다니는 누군가의 손에 닿았으면 하는 바람인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에게 받았던 물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지나간 관계의 누군가가 써주었던 편지들도 오랜 시간이 지나 한 번쯤은 다시 꺼내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인연들이 떠오르진 않습니다. 그 당시의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순수한 마음으로 답장을 썼던 제 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물론 그 사람들은 진작에 제 편지를 당장 분리수거하였다 하더라도 생각보다 기분이 씁쓸하지 않습니다.

비우지 못하고 채워 넣기만을 바라는 것은 모순이며 비워내야만 비로소 채워지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움과 채움의 균형에 대해서는 제 인생에서 아직 깊게 고민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저 같은 사람에게 균형을 맞추어 주는 것이 바로 이사 같은 것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이사해 보기로 했습니다.


비우는 시간은 여전히 어렵지만 그만큼 채워질 공간을 상상하면 조금은 설레기도 합니다.

비워낸 자리에 어떤 물건과 순간들이 들어설지, 어떤 새로운 추억이 만들어질지 궁금합니다.


이번 집에는 꿈에 그리던 저만의 서재가 생겼습니다.

그 안에 감당할만한 작은 초록잎 화분들을 들여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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