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흰 코끼리 같은 언덕」을 읽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흰 코끼리 같은 언덕」은 ‘두 남녀가 여자의 수술 문제로 갈등한다.’는 매우 단순한 이야기다. 작품 속 시간은 역에 열차가 들어오기까지 40분. 분량도 원문 기준 여섯 쪽. 그중 대부분이 매우 짧은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 읽기에 전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이 안에 다양한 상징과 의미들이 숨어있고, 대부분의 작품 해설이 그것들을 알기 쉽게 풀이해 주는 데에 할애한다. 물론, 상징을 찾고 그 의미를 밝히는 일은 작품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그것만이 이 작품의 전부는 아니다.
상징과 의미에 앞서 본 작품에서 중요한 건 두 인물 간의 관계다.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도, 관계를 보여주는 핵심이며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텍스트의 번역문이 아닌 원문을 읽어야 한다. 텍스트는 문자로 이루어져 있고, 본 작품의 대화에선 그 문자로 만든 단어의 위치와 모양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짧고 간결한 대사는 하드보일드 문체로 유명한 헤밍웨이의 특징이다. 특히 「흰 코끼리 같은 언덕」은 그 특징이 더욱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원문 대화를 뜯어보면, 각운을 맞춘 운율과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채 제자리를 빙빙 도는 반복의 답답함과 단어의 모양과 배치가 주는 묵직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이건 분명 작가가 의도한 디자인인데, 너무나 아쉽게도, 번역에서 이런 디자인까지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작중 등장하는 두 인물은 원문에선 The American=the man, Jig=the girl로 표기한다. 작품의 배경이 스페인인데 남자가 미국인이고, 그의 “가방에는 그들이 함께 밤을 지낸 호텔의 라벨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게다가 man과 girl은 그 뉘앙스 차이가 분명하다. man은 완연한 성인 남성인 데 반해 girl은 주로 18세 미만의 소녀를 가리킨다. 둘의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게 확실하다. 하지만 수많은 번역본에선 두 인물을 지칭하는 호칭이 ‘사내-아가씨’, ‘남자-여자=젊은 여자’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언어가 달라지면, 영어단어 man-girl의 관계를 온전히 전달하긴 어렵다. 자칫 두 인물의 관계를 단순한 커플이나 부부로까지 잘못 읽을 여지가 있다. “애를 낳는 게 당신에게 중요한 일이라면 나도 기꺼이 받아들일 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남자는 줄곧 “아주 간단한 수술”이라며 여자가 낙태 수술을 받기를 은근히 강요한다. 이 상황을 생각해 보면 두 인물의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작품을 읽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작품 초반, 둘은 술집에서 ‘아니스 델 토로’라는 술을 주문하고, 주문을 받은 여자는 묻는다.
“With water?”
그 뒤로 이어지는 대화에선 with water가 문장 끝에 각운을 맞춰 총 네 번 반복된다.
“Do you want it with water?”
“Is it good with water?”
“You want them with water?”
“Yes, with water.”
각각의 문장을 번역하면 “물을 타 드릴까요?”, “물을 탈까?”, “물을 타면 맛이 좋아지나요?”, “물을 타 드릴까요?”, “네, 물을 타 줘요.”가 된다. ‘물을 타’의 반복으로 얼추 운율을 맞출 순 있지만, 원문과 달리 문장에서 해당 단어가 들어가는 위치와 모양이 달라지므로 작가가 의도한 대화의 효과를 고스란히 느끼기 어렵다.
술에서 감초 맛이 난다거나, “산맥이 꼭 흰 코끼리같이 생겼다”며 맥주를 마시다가, 남자는 여자에게 “그냥 공기만 집어넣는”“아주 간단한 수술”을 받길 권하고, 수술만 받으면 둘은 전처럼 괜찮아질 거라 말한다.
그러자 여자는 묻는다.
“What makes you think so?”
“That’s the only thing that bothers us. It’s the only thing that’s made us unhappy.”(...)
“And you think then we’ll be all right and be happy.”
think와 thing의 발음 유사성, unhappy와 happy를 각운으로 운율을 맞추고 있지만, 이 역시 번역하면 ‘생각’, ‘그것’, ‘불행’, ‘행복’으로 각 단어 발음의 유사성이 완전히 휘발되고 만다. 이어지는 대화도 이와 비슷하게 ‘사랑(love)’, ‘걱정(worry’), ‘어찌 되든 상관없다(care about me).’ 같은 특정 단어를 반복하면서 자꾸만 같은 얘기를 말꼬리 잡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며 이어진다.
"And if I do it you'll be happy and things will be like they were and you'll love me?“
"I love you now. You know I love you.“(...)
"I'll love it. I love it now but I just can't think about it. You know how I get when I worry."
"If I do it you won't ever worry?"
" I won't worry about that because it's perfectly simple."
"Then I'll do it. Because I don't care about me."
"What do you mean?"
"I don't care about me."
"Well, I care about you.“
그러다 여자는 “강 건너 저 멀리에 산들”과 “구름 한 점”과 “나무 사이로 강”을 바라보며 말한다.
“And we could have all this,”(...)“And we could have everything and every day(...).”.
“그게 무슨 소리”냐고 남자가 되묻고, 이어지는 대화는 could have의 반복과 변형으로 이루어진 문장의 벽돌들이 우수수 떨어질 뿐이다.
“I said we could have everything.”
“We can have everything.”
“No, we can't.”
“We can have the whole world.”
“No, we can't.”
“We can go everywhere.”
“No, we can't. It isn't ours any more.”
대화가 이런 식이었으니,
“I don’t want you to do anything that you don’t want to do.”(...)
“that I don’t want you to do it if you don’t want to.”(...)
“(...)I don’t want anybody but you.(...)”
하며 같은 말을 다시 세 번이나 반복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Would you please please please please please please please please stop talking?”
이라고 please를 일곱 번이나 붙여 말하는 심정이 더욱 이해가 간다. 특히 이 문장은 please라는 단어가 마치 박음질하듯이 박혀있는 모양 그 자체만으로 어떤 무게를 지닌다.
소설을 이해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작가의 생애를 찾아보고 작품이 쓰인 시기적 배경과 당시 작가의 상황을 연관 지어 볼 수도 있고, 작품 내의 여러 상징과 의미를 누군가의 해석에 빗대어 보거나, 혹은 자신만의 견지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같은 작가가 쓴 다른 소설이나 다른 작가가 쓴 비슷한 소설을, 혹은 해당 작품을 원작으로 한 다른 매체의 작품을 찾아 비교해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라는 섬유로 촘촘히 엮인 소설이라는 그물은 그 섬유 하나하나를 뜯어볼 때 가장 원초적인 기쁨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