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꿀체리 Jan 31. 2021

인생의 빠떼루는 느닷없이 온다

벼락거지의 투자 에세이


인생을 살다 보면 급작스럽게 빠떼루를 당할 수 있다. 나는 작년에 인생의 빠떼루를 세게 맞았다.



십여 년간 준비한 시험에서 끝내 불합격한 것도 인생의 실패이지만, 그것은 천천히 나에게 왔다. (이전 글 14년을 투자한 시험에서 떨어져 봤어?)  


나는 이미 패배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고 관성에 의해 경기에 출전하고 있었다. 마치 노쇠한 육상선수가 점차 기록이 떨어지는걸 알면서도 경기장 트랙을 달리듯이 말이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레스링 매트에 올라 빠떼루를 당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달리기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는 그나마 덜 잔인한 경기라는 것을.




"살면서 우리는 때때로 빠떼루를 받습니다. 이유가 있을 때도 있지만 이유도 모르고 받는 빠떼루도 많습니다"

-김경록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대표의 글 <김경록의 욜로 은퇴> 중에서-



빠떼루(Parterre):파테르. 레슬링 용어로 수동적으로 경기에 임하는 선수에게 주는 벌칙. 매트의 중앙에 엎드린 자세로 있게 하고 무방비한 상태인 뒤를 상대방이 공격한다. 공격받은 사람은 벌렁 뒤집히지 않기 위해 바닥에 붙어 악착같이 버텨야 한다.




나는 육 남매의 막내로 자라면서 내 위의 형제들이 인생에서 강한 펀치를 맞고 KO 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들은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 이혼하기로 했어"라 말거나 무리한 사업으로 집안 살림에 빨간딱지가 붙었다 소식을 전했다. 그것보다는 덜하지만, 자녀들의 외국 유학 뒷바라지 끝에 결국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는 소식을 건네준 형제도 있었다. 그들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괴로웠다. 그들 때문에 비탄에 빠진 친정어머니를 보는 것은 더욱 괴로웠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절대 인생에서 큰 이벤트를 만들지 않겠다'




나의 마흔 이후의 인생의 모토는 바로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매우 소극적이지만, 그것이 최선이었다. 인생이 송두리째 뒤흔들릴만한 위기를 겪지 않고 지나가는 것. 나에게 그것은 인생의 성공과 같은 말이었다. 놀이공원에 가서 롤러코스터를 타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지루하지만 평탄한 모래사장을 걷는 것을 선택했다. 그들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나는 과욕을 경계하고 검소하면서 소박하게 살자고 마음먹었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자고 일어났더니 '벼락 거지'가 되는 인생의 벌칙을 받은 것은. 오직 집을 사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이다.(전 글 나는 대한민국 무주택자입니다) 차곡차곡 돈을 모아서 이제 막 집을 려고 하던 순간, 집값은 이미 구름 위로 둥둥 떠오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괴이한 일이 믿기지가 않아서 몇 달 정도 지나면 꿈처럼 사라질 일이라고 생각했.



그러나 지금 나는,  뼈아프지만 내가 '벼락거지'가 되었다는 것을 인한다. 인생의 빠떼루를 피하려다가 결국 빠떼루를 맞은 셈이다. 소극적으로 나 자신을 방어하면서 살아온 삶이 그렇게 잘못된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급작스럽게 인생의 벌칙을 받으면서 검소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내 삶 또한  송두리째 부정당했다는 것이다.




나는 모아둔 돈이 얼마나 있나 은행 잔고를 뽑아보았다. 1억이 약간 넘는 돈이 있었다. 투자자들이 말하는 저축이란, 현금이 녹아내리는 최악의 투자이지만, 나에게는 그동안의 검소한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돈이었다. 집값이 올라서 어쩌냐는 친정어머니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엄마, 내가 누구야 엄마 딸이잖아. 돈 많이 모아놨으니까 걱정마슈."라고 큰소리쳤지만, 이제 다시 보니 올라버린 집값에 비해서는 턱없이 초라해져 버린 돈이었다.




IMF 경제위기 이후 '완전고용'이 사라지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해왔던 나는, 지금부터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전문가들은 뉴노멀과 언택트를 말했지만, 내가 떠올린 것은 이 네 글자이다.  



각.자.도.생.



아무도 벼락 거지로 전락한 사람들의 좌절과 절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국가마저도. 이제 믿을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안목과 신념으로 제각기 살길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비열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급작스러운 공격은 받았으나 아직 뒤로 발라당 뒤집힌 것은 아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나는 1억의 돈을 은행계좌에서 모두 인출했다.


작가의 이전글 시험을 포기하고 내가 알게 된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