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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탈리스트>, 민낯 속에서 짓밟히는 이민자의 영혼

브레디 코베, <브루탈리스트(2024)> 리뷰

by 새시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재 소위 ‘인스타 카페’들의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카페는 노출 콘크리트 형태를 차용하고 있다. 이렇게 노출 콘크리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인테리어는 건축 양식이자 본 작품의 제목과 큰 관련이 있는 건축 양식인 ‘브루탈리즘’의 특징을 차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브루탈리즘’은 기본적으로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단순하고 웅장하게 만들어내는 건축 양식이기 때문이다. 본 작품 <브루탈리스트>는 노출 콘크리트처럼 미국의 민낯을 노출시키며 이러한 민낯이 이민자의 영혼이 짓밟혔는지에 대해 말하면서도, 이러한 상황이 비단 미국뿐만이 아니라 보편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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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집힌 미국의 상징들


영화의 극초반부, 2차 세계 대전 유대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주인공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 분)’는 미국으로 향하는 이민선에 탑승한다. 기다리던 미국에 도착한 그는 같이 온 일행과 함께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희망찬 환호성을 지른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카메라는 로우 앵글을 통해 거꾸로 잡아낸다. 미국에서의 그의 삶은 이와 비슷하게 흘러간다. 희망찬 미래를 꿈꾸었던 ‘라즐로’는 속을 숨기며 살아가는 미국의 기득권층에게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장면으로, ‘해리슨 본 뷰런(가이 피어스 분)’이 ‘라즐로’를 찾으러 공사장에 방문하는 차량을 촬영한 장면이 있다. 이 역시, ‘라즐로’의 시선으로 그려지는데 앞선 장면과 반대로 하이 앵글을 통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해리슨’의 태도에 대한 복선으로 볼 수 있는데, 그가 ‘라즐로’에게 보여주는 호의적인 태도 내면에는 우월감과 열등감 등 다양한 부정적인 감정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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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탈리즘’처럼 드러난 미국의 민낯에 짓밟힌 이민자의 영혼


초반부, 카메라는 ‘라즐로’가 자신의 사촌을 만나러 가는 버스 속에서 바라보는 전방 풍경을 보여준다. 밝은 화면 속 풍경은 희망적으로 느껴진다. 후반부, 비슷한 풍경을 카메라는 다시 보여준다. 초반부와 반대로, 어두운 화면 속 풍경은 절망적으로 느껴진다. <브루탈리스트>는 215분의 러닝타임을 통해 미국의 민낯이 이민자의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는 지를 보여준다.


<브루탈리스트>의 1막은 분명 희망적이다. 모함으로 인해 사촌이 ‘라즐로’를 저버리고 이로 인해 노숙자 신세에까지 몰리게 되지만,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후원자를 만나 다시금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헤어졌던 아내와 조카를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인터미션은 이러한 희망이 최고조로 높은 시점인데, 아내와 조카가 같이 담겨 있는 ‘라즐로’의 결혼사진을 15분 동안 보여주며 관객들이 더욱 희망적으로 느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 이러한 희망은 2막이 진행되는 내내 무너진다. 1막에서 애써 무시했던 미국의 민낯이 주인공을 짓밟기 때문이다. ‘해리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라즐로’를 아래로 여기면서도 열등감을 드러내는데, ‘구두닦이’ 같은 발음 등을 통해 ‘라즐로’를 ‘라즐로’의 아내 ‘에리자벳(펠리시티 존스 분) 앞에서 무시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돈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해리슨’은 원가 절감을 위해 처음 정했던 설계를 포기하여 ‘라즐로’가 자신의 급여에서 이를 보조하는 상황이 생기며, 심지어 기차 사고로 인해 부상자가 발생하자 공사를 아예 중단시키고 인부들과 관계자들을 전부 해고하기도 한다. ‘해리슨’의 만행은 이탈리아의 카라라 채석장에서 만취한 ‘라즐로’를 강간하는 부분에서 극대화된다. ‘라즐로’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피해를 그들 탓으로 돌리며 그를 강간하는 장면은 전쟁으로 인해 큰돈을 벌게 된 그의 모습과 매치되며 그들의 아픔을 논하지만 공감할 생각은 없던 당대 미국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즐로’의 아내 ‘에리자벳’은 이민자의 영혼과 같은 역할을 한다. ‘라즐로’는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폭력에 짓밟히기도 한다. 하나, 그는 이러한 잘못과 상처 모두 외면하려고 한다. 하나 ‘에리자벳’은 이러한 그의 잘못과 상처를 모두 마주한다. 이를 통해 그는 ‘라즐로’가 자신의 잘못과 상처를 마주하게 하며 회복할 수 있도록 하며 ‘해리슨’의 만행을 그의 가족들 앞에서 외치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꺾이지 않은 의지를 상징하는 ‘에리자벳’는 전쟁으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된 상태이다. 마치 전쟁으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지만, 무너지지 않은 이민자들의 영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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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만 해당되지는 않는 이야기


영화는 에필로그 이전까지 미국의 민낯과 이로 인해 짓밟힌 이민자들의 삶에 집중한다. 하지만, 에필로그를 통해 이러한 논제가 미국에 한정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라즐로’의 손녀인 ‘조피아(래피 캐시디(1막 및 2막), 아리안 라베드(에필로그) 분)’는 에필로그의 무대인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에서 작중 ‘라즐로’가 매달렸던 건축물인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에 대해 ‘라즐로’ 및 ‘에리자벳’이 지냈던 강제수용소를 재현하고 나누어져 있었던 그들이 만나려는 의지를 담아 건축물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하나, 1막과 2막 어디에서도 ‘라즐로’는 이를 언급한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유대인들에게 ‘과정이 아니라 목적지가 중요했다’는 ‘조피아’의 말을 통해 미국을 벗어나서도 시오니즘이라는 사상에 ‘라즐로’가 이용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2막 후반부가 연상되는 부분인데, ‘해리슨’의 실종이라는 혼란 속에도 그 배경인 건축물은 그저 고고히 서있기 때문이다. 자연광이 천장의 십자가 모양의 구멍을 통과하며 만들어져야 하는 십자가가 ‘해리슨’을 찾는 인공조명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장면은 ‘조피아’가 ‘라즐로’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의 삶과 건축물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같다. 작품은 에필로그를 통하여 건축물과도 같은 순수한 목적을 가진 존재가 어떠한 문화에서도 이용당할 수 있음을 말하며 작품의 상황에 보편성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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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탈리스트>는 노출된 콘크리트처럼 미국의 민낯을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서서히 드러내면서, 그 과정에서 이로 인해 무너지는 외부인의 서사를 처절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는 동시에 이러한 논제가 미국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보편적일 수 있다고도 말한다. 그렇기에 <브루탈리스트>는 215분 동안 ‘라즐로’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이민자가 겪는 희망과 좌절의 과정을 강렬하게 전달하는 수작이다.




* 제81회 베니스 감독상(브레디 코벳) 수상

*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에이드리언 브로디) 수상, 촬영상 수상, 음악상 수상, 감독상, 미술상, 편집상, 작품상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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