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세계의 주인(2025)> 리뷰
* 너무나도 좋은 작품이기 때문에 작품을 감상한 이후에 읽는 것을 적극 권장합니다.
0. <세계의 주인>의 이야기는 주인공 ‘주인(서수빈 분)’이 남자 친구와 진한 입맞춤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은 그 시기의 청소년들처럼 성에 관심이 많은 아이다. ‘주인’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친구들과 야한 이야기를 하며, ‘주인’의 가장 친한 친구인 ‘유라(강채윤 분)’는 야한 내용의 만화를 그리기도 한다. 작품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성에 관한 관심이 동 시기를 겪는 청소년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그려낸다. ‘주인’은 이렇듯 동 시기의 친구들처럼(사실은 조금 많이 더 활달한) 청소년기를 보내는 중이다. 하나, 갑작스럽게 ‘주인’ 앞에 나타난 서명부와 함께 이러한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세계의 주인>은 이러한 ‘주인’의 이야기와 함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따뜻하게 풀어나가는 굉장한 작품이다.
* 아래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이야기는 ‘주인’의 학우인 ‘수호(김정식 분)’가 아동 성폭력 가해자가 출소 후 복귀 반대 서명 운동을 실시하며 다시 시작된다. ‘주인’은 서명부에 쓰인 ‘성폭력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라는 글귀가 틀렸다고 지적하며 서명을 거부한다. 이로 시작 된 ‘수호’와의 갈등 등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주인’은 친족 성폭행 피해자임이 밝혀진다. 자신의 모습이 상처 속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으로 보이냐는 반문과 함께, ‘주인’은 자신의 상처가 ‘씻을 수 없는’ 평생의 상처가 아니라고 하며 거부했던 서명부에 서명을 한다.
2. 작품은 이렇듯 ‘성폭력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라는, 많은 이들이 당연시 여기던 명제를 세심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주인’은 다소 활달할 뿐, 동시대를 보내는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는, 빛나는 일상을 살아가는 보여주는 소녀이다. 그는 이러한 모습을 통해 상처를 안고 있는 이들도 진실로 빛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작품은 ‘빛날 수 있다’가 ‘그래야 한다’로, 혹은 ‘상처가 없다’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한다. 세차장에서 오열을 하는 ‘주인’을 담아낸 장면은 이러한 작품의 기조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수호’와의 다툼 이후 징계를 피하기 위해 성폭행 피해자임을 밝힌 ‘주인’은 이에 대해 담담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친 ‘누리(박지윤 분)’를 꼬집으며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주인’의 모습은, ‘누리’를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영해 그 시기에 대한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3. 이야기는 이후 이러한 ‘주인’의 빛나는 모습이 진실된 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주인’이 서명에 반대한 이후, 누군가 그의 자리에 ‘주인’의 모습이 거짓이라고 지적하는 쪽지를 숨겨두었기 때문이다. 상처를 가진 이는 빛날 수 없다는 편견 때문이다. 비슷하게, ‘주인’의 진실성을 지적하는 쪽지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익명의 쪽지에서뿐만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임을 드러낸 이후 친구를 포함한 주변 인물들에게도 이러한 시선이 느껴진다. 평소처럼 다른 이성 친구와 장난을 치던 ‘주인’을 과보호기도 하며, 가장 친한 친구인 ‘유라’는 ‘주인’의 진실됨을 의심하며 잠깐 멀어지기도 한다. ‘주인’ 역시 이러한 상황을 쉽게 버티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어머니가 쓰러진 이후에 변한다. 역시 아픔을 참고 있던 버티던 어머니는, 수술 이후 자신을 찾아온 ‘주인’의 손을 꼬집으며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작품은 이를 통해 ‘주인’의 빛나는 모습과 상처 모두 그가 가진 진실된 모습임을 말하며, 더 나아가 상처를 가진 모든 이들이 빛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따뜻하게 말한다.
4. 그러한 점에서, 작품의 결말은 굉장히 따뜻하다. ‘주인’을 괴롭히던 쪽지의 주인공이 ‘주인’과 같은 처지에 놓인 학우라는 진실과, ‘주인’의 진실성을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점차 그러한 모습에 용기를 얻었다는 내용이 담긴 마지막 쪽지는 ‘주인’의 모습이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은 이 쪽지의 내용을 다양한 목소리로 담아내 상처를 가진 모든 이들에게 빛날 수 있다는 진실을 따뜻하게 전달한다.
5. 결국, 작품이 말하는 답은 ‘사랑’이다. 뻔할 수도 있는 이러한 답을 작품은 따뜻하고 세심한, 그리고 정교한 시선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주인’의 주변에는 사랑이 가득하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아픔을 견디고 버티는 엄마, 누나를 위해 가해자인 삼촌의 편지를 숨기고 걱정이 사라지는 마술을 하려고 하는 동생(이해인 분), 같은 상처를 가지며 서로 연대하는 봉사단 동료들, 밝혀진 진실로 인해 혼란스러워 하지만 결국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선택한 절친 ‘유라’와 그를 항상 따스하게 챙겨주는 도장 관장까지, ‘주인’은 많은 사랑 속에서 빛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진로에 ‘사랑’이라고 적어낼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6. 작품의 후반부, ‘주인’의 태권도장 관장 ‘대한(이대연 분)’은 도장 벽에 페인트칠을 하는 기사에게 그을린 자국은 덮을 필요 없다고 말한다. 벽에 있는 상처가 있어도 도장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듯이, <세계의 주인>은 상처를 가진 이도 빛날 수 있다는 당연하지만 낯설었던 사실을 ‘주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심하고 따뜻하게 전달한다. 동시에 세상의 많은 부분은 선으로 가득 차 있다는 시선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본 작품은, 어떠한 상처가 있든 우리는 모두 우리 '세계의 주인'이기 때문에 빛날 수 있다고 따뜻하게 말한다. 며칠 동안 여운이 사라지지 않는, 아마 올해 최고의 영화일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굉장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