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델 토로 <프랑켄슈타인(2025)> 리뷰
0. 삶과 죽음은 모든 생명이 공유하는 공통적이고 근원적인 경험이다. 모든 생명의 삶은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이며, 이는 불변의 진리이다. 인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진리를 깨고자 노력하였지만,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죽음을 맞이하였다. <프랑켄슈타인>은 이러한 죽음을 정복하고자 하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오스카 아이작 분)’의 이야기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도록 하는 작품이며, 동시에 그가 만들어진 피조물과의 관계를 통해 삶과 죽음 사이의 고리를 담당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다룬 작품이다.
* 아래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작품의 두 주인공인 ‘빅터’와 ‘크리처(제이콥 엘로디 분)’는 각자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강력하게 나아가는 인물들이다. ‘빅터’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무기력하게 잃은 이후 죽음을 정복하겠다는 목표를 갖게 된다. 그는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완벽한 생명을 창조하고자 하고, 이를 위해 시체의 여러 부위들을 재조합하여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낸다. 이에 반해 ‘크리처’는 죽음을 맞고 싶은 인물이다. 탄생 이후 여러 아픔과 상실을 겪으며 큰 고통을 겪은 그는, 소중히 여기던 사람들이 죽음을 통해 그를 떠났듯 자신도 죽음을 통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2. 그들이 이렇게 목표에 집착하는 이유는 ‘부성애의 부재’에 있다. ‘빅터’와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찰스 댄스 분)’의 관계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부재한 관계이다. ‘빅터’의 아버지는 그가 아는 세계인 ‘의학’에서 ‘빅터’를 최고로 키우기 위하여 완벽을 강요하였다. 의학 지식에 대해 제대로 답하지 못한 ‘빅터’의 얼굴에 매를 가하는 장면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빅터’의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빅터’의 얼굴에 어머니의 피가 묻는 장면은 그의 아버지에게 얼굴에 매질을 당한 장면과 오버랩되는데, 이는 이러한 경험들로 인해 ‘빅터’의 내면이 부서졌음을 보여준다. ‘크리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탄생은 ‘빅터’의 축하와 환호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그가 아는 유일한 세계인 ‘빅터’가 그에게 완벽을 강요하며 폭력을 행하면서 그 역시 부서진다. 두 명의 주인공이 모두 어떠한 방식으로든 얼굴에 상처를 얻는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레오폴드’와 ‘빅터’가 자신의 자식을 하나의 ‘생명’이 아닌 ‘피조물’로 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각자의 자식은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3.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쓰다듬’은 앞에서 언급한 그릇된 부성애와는 상반되는 행위이다. 이는 ‘있는 그대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담고 있고, 그렇기에 온전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레오폴드’와 ‘빅터’가 자신의 자식들에게 주지 못한 사랑이다. 그렇기에 임종에 들기 직전의 ‘빅터’가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하라’며 ‘크리처’를 쓰다듬어주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온전한 부성애를 ‘크리처’에게 전달하는 행위이다. 이는 ‘빅터’가 ‘크리처’를 자신의 완벽을 구현하기 위한 대상이 아닌, 부서진 채로도 살아가야 하는 온전한 아들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부성애의 부재로 인해 죽음을 갈구했던 ‘크리처’를 이러한 집착에서 해방시켜 주었으며, 동시에 앞이 안 보이는 설원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4. 작품은 ‘빅터’와 ‘크리처’의 이러한 이야기와 마지막 장면에서의 ‘바이런 경’의 명언을 통해 생명의 정의를 ‘부서진 채로도 살아가는 존재’라고 정의한다. 생명을 창조하는 행위는 오만하지 않다. ‘빅터’의 탄생이 두 남녀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실이듯, ‘크리처’의 탄생 역시 작품은 오만한 행위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은 시체들을 자르고 붙이는 잔인한 장면을 서정적으로 묘사하여 생명을 창조한다는 행위를 낭만적으로 그려낸다. 오만한 것은 생명의 창조가 아닌 생명을 정의하는 행위이다. ‘빅터’는 ‘크리처’가 이성적인 사고를 못한다는 이유로 생명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이는 본인이 창조자라는 이유로 생명을 정의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오만이다. 이에 반해, ‘크리처’는 본인이 생명임을 깨달아가는 존재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고, 동시에 자신도 상처받는다. ‘크리처’는 이러한 순환 속에서 존재하고 부서지고 또 살아간다. 살아가는 것은 결국 삶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고, 이는 모든 생명이 갖는 근원적인 모습이다. 새장 속에 갇힌 나비가 그랬고, 소중한 이들을 모두 잃은 ‘빅터’ 역시 그랬다. 그렇기에 생명이란 ‘부서진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5. 작품에 흔하게 널려있는 수많은 죽음은 이러한 생명의 존재를 더욱 빛나게 한다. 생명은 순환 속에서 부서지며 존재한다. 그러한 순환 속에서 죽음은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작중 ‘크리처’가 언급하듯, 죽음에는 언제나 악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늑대는 살기 위해 양을 죽였고, 사람들은 양을 지키기 위해 늑대를 죽였다. ‘크리처’ 역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혹은 죽음을 맞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 이는 죽음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어떠한 의미를 무조건적으로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죽음이 순환 속에 자연스럽게 존재함으로서, 생명 역시 순환 속에 존재할 수 있다. 즉, 죽음은 생명의 존재를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6. <프랑켄슈타인>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특유의 뒤틀린 아름다움이 강하게 담긴 작품이다. 작품은 그 안에 흔하게 널린 수많은 죽음과 이로부터 탄생한 생명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하며, 이를 통해 부서진 채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은 숭고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렇기에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이라는 잔혹한 소재를 활용해 생명의 아름다움을 그려낸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