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세월의 균열

앤드류 헤이, 45년 후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45주년 파티를 준비하는 일주일 동안의 균열을 담은 영화, <45년 후>.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구도로 진행된다. 어느 날 제프에게 온 편지는 제프의 첫사랑 a.k.a 'My' 카티야의 시신을 찾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미 카티야의 존재를 알고 있던 케이트는 제프의 멈출 줄 모르는 케이트 이야기를 듣는다. 케이트는 제프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고, 빙하에 대해 공부하며 친구들을 만나도 빙하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 그에게 실망한다. 제프는 세를 들며 살기 위해 당국에 '결혼한 사이'라고 말했어야 했고, 가짜 결혼반지도 꼈다고, 케이트의 보호자였다는 사실에 심란해진 케이트는 열심이었던 파티 준비도 그럭저럭하게 된다. 

결국 케이트는 제프에게 더이상 카티야에 대해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제프는 오밤 중에 다락방을 뒤져 케이트의 사진을 발견한다. 케이트는 다음 날, 카티야의 사진을 보고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케이트는 시내 여행사에 제프가 스위스에 대해 문의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제프는 들키자 미안해한다. 케이트는 자고, 내일 아침에 새롭게 시작하자고 말한다. 새롭게 시작할 준비가 됐다는 듯 제프는 아침에 케이트를 깨우며 차를 대접하고, 계란 요리도 한다. 그리고 파티에서 눈물을 흘리며 케이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둘은 춤을 추며, 케이트는 마지막에 제프의 손을 뿌리친다.  

영화는 조금 지루하다. 그러나 연출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감탄하면서 봤다. 이토록 섬세한 연출이 담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생각했다. 우선 케이트와 제프의 결혼 생활을 보여주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45년. 상상도 하기 힘든 길고 긴 세월을 그들이 사는 마을을 케이트가 맥스를 산책시키는 장면에서 디테일이 녹아있다. 원근감을 가득히 담은 마을 속 각기 다른 장면들. 이 장면에서 케이트가 산책하는 몇 가지 산책 루트, 곧 그녀의 평범한 일상을 통해 세월감을 느꼈다. 그리고 제프와 케이트가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가 영화를 한층 더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가령 카티야의 편지가 독일어로 돼있어 창고에서 사전을 찾는 장면에서도 "플라스틱 박스를 봐봐."라는 말. 부부가 보낸 세월을 어떤 물건을 찾는 장면에서 자연스레 녹였다. 처음 만났을 때의 추억을 회상하는 대화도 마찬가지였고, 대사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가 몰입도를 더 높였다. 

특히 케이트가 카티야의 사진을 발견하는 장면 연출이 그 어떤 서스펜스 영화보다 몰입감 있었다. 제프만 알고 있는 카티야와의 진실을 찾아내려는 케이트의 복잡미묘한 표정과 알아버린 후 충격받는 표정. 그리고 오른쪽 화면에 천천히 등장하는 카티야의 사진. 렌즈의 초점이 케이트에서 카티야로, 다시 케이트로 이동하는 장면은 그 어떤 스릴러 보다도 섬뜩했던 장면이었다. 남편의 첫사랑에 대한 진실을 누구보다 알고 싶어 하지만, 그 누구보다 모르고 싶은 심정을 이 장면으로 여기서 표현했다. 진실을 알아내려는 인물-진실이 담긴 장면의 화면 비율을 저렇게 표현할 수 있구나하고 감탄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엔딩장면. Smoke get in your eyes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노래의 가사가 케이트의 내면을 대신한다.

하지만 지금 나의 사랑은 날아가버렸고, 난 나의 사랑 없이 남겨졌네. 사랑의 불꽃이 꺼져갈 땐 그 연기가 눈에 스민다고. 

제프의 손을 뿌리치고 거의 흐느끼는 케이트의 표정. 이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케이트는 제프와 이별했을까? 80% 그랬을 거라고 확신한다. 45년 동안 같이 살았더라도, 비록 케이트는 제프와 결혼 전에 관련있던 인물이더라도, 그녀의 머릿속은 카티야가 임신했었다는 사실과 제프는 아직도 카티야를 사랑할 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반면 제프는 무슨 자신감으로 케이트에게 카티야에 대해 말했을까. 45년 간의 세월이 제프에게 주는 의미는, 그녀가 카티야의 존재를 알더라도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었을까? 첫사랑은 첫사랑일 뿐이고, 죽은 카티야에 대한 기억은 지금의 자신에게 거대한 사건이었으니 이해를 요구한다는 태도였을까?  

긴 세월의 균열은 편지 한 장으로 비롯될 수 있다. 제프에게 도착한 작은 편지 한 통이 45년 동안 쌓아온 부부의 신뢰 관계를 무너뜨렸다. 내가 평생 알던, 사랑하던 사람에게 있던 새로운 과거를 알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가. 모른 체 할 것인가, 진실을 알아버릴 것인가. 괜찮은 척 할 것인가, 솔직하게 말할 것인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포기하고 그 사람과의 이별을 택할 것인가. 45년이라는 시간이 인생의 전부라고 다가오는 거대한 시간이기에 그 어떤 선택에도 주저하게 된다. 거대한 사건 하나 없이 케이트의 표정 변화로만 영화를 이끌어간,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