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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케터 S Feb 21. 2021

케이크라는 인생, 인생이라는 케이크

민규동,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은 바둑판에 인생이 있다고 말한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야구야말로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말한다. 나는 라디오를 좋아하는 작가니까 라디오야말로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긴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말한다.’ 남효민 작가의 <그래서 라디오> 한 구절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인생 대부분을 보낸 것. 그것이 인생의 축소판이 되는 것이야말로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증거 아닐까? 앤티크에게는 그것이 ‘디저트’다. 디저트 중에서도 가토 오 오페라.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초콜릿, 진한 향기의 커피 맛, 그리고 아몬드 가루의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어우러져 내는 조화로움이 한 편의 오페라와도 같다고 할까요? 아니, 희로애락이 뒤섞여 있는 우리의 인생 같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자, 인생을 먹어보시겠습니까?’


각기 다른 이유로 디저트 가게에서 일하는 네 명의 남자, 그리고 그들이 가진 상처에 대한 영화, 앤티크다. 





사람을 기억하는 데 첫인상이 중요하듯, 영화의 오프닝은 첫인상만큼 중요한 장면 아닐까. 그래서 오프닝이 인상적인 영화는 참 많다. 강렬한 노래로 시작하는 <라라랜드>, 조커의 인상적인 등장을 알리는 오프닝 시퀀스 <다크나이트>, 시작하자마자 눈물 나는 애니메이션 <업> 등등… 앤티크의 오프닝은 뇌리에 깊게 남을 만큼 인상적이진 않았지만, 시나리오를 읽고 나니 꽤나 인상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앤티크는 김재욱(민선우 역)이 주지훈(김진혁 역)에게 고백하고 진혁이 선우의 얼굴에 케잌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나열되는 쟝 파티시에의 내레이션. ‘사람들은 행복의 정점에서 꼭 케잌을 찾게 되죠. 본능처럼 말이죠. 왜 그럴까요?’ 


한번 중독되면 벗어나기 힘든 디저트의 유혹.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 이 메시지로 앤티크가 시작되고, 영화는 사장 진혁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진혁은 케잌을 먹자마자 토하는 사람이다. 그는 케잌을 먹으면 불행해지는 사람이면서도 앤티크를 차린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꼭 한번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다. 그 사람은 민준(어린 날의 진혁)을 유괴한 남자인데, 유괴라는 소재는 영화 전체 흐름과 분위기를 한 번에 바꿔놓는다. 그래서 중반까지 행복하고 평화로울 것만 같던 앤티크를 그 이후부턴 ‘그때 민준에겐 무슨 일이 있었고, 왜 유괴 사건이 일어난 것인지’를 추리하게 된다. 


민준은 어느 날 김창완(흰수염 역)에게 유괴됐고, 흰수염은 민준에게 케잌을 매일 먹였다. 어느새 두 달이 흐르고, 민준은 집에 가야 한다며 가까이 있던 날카로운 물건으로 흰수염의 왼쪽 허벅지를 찔렀다. 흰수염은 이제 가라며 마지막에 “잊어버려”라고 한다. 집에 돌아왔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민준은 친구들과 함께한 생일파티에서 케잌을 먹곤 바로 토한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들은 엄마와 할머니의 대화. “똑똑한 아이가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걸 보면, 그 사람이 틀림없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게 틀림없어요.” 민준은 이후 거울을 보며 가슴팍에 생긴 비밀의 서랍을 보게 된다. 그리고 어떤 검은 기운이 그를 감쌌고, 민준은 그 서랍을 꼭 닫아버리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그 비밀은 서랍에만 갇혀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 기억은 후에 악몽으로 나타나, 결혼을 기대한 친구들과 결혼하지 못하게 되는 열쇠가 된다. 밤마다 악몽을 꾸고, 어딘가 두렵고 무서워 보이는 사람이라며. 그렇게 평생 악몽에 시달려 살게 될까 두려운 마음에 케잌광이었던 흰수염을 다시 만나 그 궁금증을 해결해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앤티크를 차리게 된다. 이때 그가 겪었던 것과 유사한 유괴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며, 앤티크에서 범인이 왔다 갈 수도 있는 가능성이 생기고, 혹시라도 그를 다시 만나게 될까 반신반의하며 형사들을 돕게 된다. 


‘그때, 이제 날 유괴했던 인간을 징벌하는 건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맛있는 케잌 가게를 만들리라 결심했다. 아주 먼 곳에서도, 케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은 와보고 싶어지는 가게를. 작은 가게를 만들리라 결심했다. 구석구석까지 내 시선이 닿는 가게를. 그리고 영업시간은 가능한 늦게까지. 직업, 연령,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든 부담 없이 케잌을 살 수 있는 가게를.’


영화는 관객과 시각으로 소통한다. 청각은 둘째치고, 관객은 눈으로 앤티크의 케잌을 맛본다. 무엇보다 시각적 미각에 집중한 이 영화는 디저트에 대한 비주얼적인 장면이 돋보인다. 디저트 가게의 황홀함을 중간중간 뮤지컬(Cake Paradise)로 표현한 것과 케잌의 향연을 여러 개의 분할된 장면으로 구현했다. 이 밖에도 쟝 파티시에의 등장을 탁자 위의 늘어진 엽서 위 하늘을 나는 비행기로 교차한 것과 유아인(양기범 역)의 상처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꽃이 가득한 링 위에 누운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에게는 링 위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음을, 링 위를 꽃밭처럼, 마치 꽃으로 장식된 네모난 조각 케잌처럼 표현했다는 것. 다양한 이야기를 빠른 장면 흐름으로 전개해 장면 전환이 탁월하다. 


앤티크에서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를 뽑으라면 배우들이 연기한 캐릭터 각자가 가진 이야기가 아닐까. 먼저 앤티크에서 일하는 네 사람 모두 아픔을 가졌다. 진혁은 어릴 적 유괴를 당한 경험을, 선우는 엄마의 외도(바람)의 대상이 자신이 처음 좋아한 남자였던 기억을 갖고 있다. 선우의 경우 성소수자라는 정체성보다 헤픈(?) 엄마에 대한 영향이 컸던 인물이다. 엄마의 부도덕이 그에게 남겨준 상처가 그를 성소수자로서, 그 스스로를 소중히 대하지 않고, 헤프게 만들려고 한 계기에 맞는 충분한 동기였다. 양기범에게 복싱은 좋아하는 것을 넘어 삶이었다. 그는 ‘망막 박리’라는 병을 얻게 되고, 복싱만 안 하면 눈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슬픈 필연이 존재한다. 그렇게 삶 그 자체였던 복싱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신체가 그에게는 아픔이었다. 최지호(남수영 역)는 어릴 적 아빠에게 구타당한 엄마를 보면서 죽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도련님인 진혁을 지키고 싶어 한다.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앤티크에 왔지만, 이 아픔을 치유하고 서로 이해하고, 진정한 친구가 된다. 


이 네 명 외에도 흰수염도 아픔이 있었다. 그는 20년 전,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해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를 유괴하고, 케잌을 먹였다. 아이가 죽었다는 것은 알지만 계속해서 아이와의 추억을 유괴로 인해 회상하려 노력한다. 그가 저지른 짓은 참혹하지만, 그에게도 아픔이 있었고 민준에게는 케이크를 먹인 것 이외에 다른 짓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무조건적으로 나쁜 인물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유괴범의 등장 때문에 죽은 아이들이 다 그가 했던 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그를 무조건적으로 나쁜 인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관객에겐 던져진다. 


진혁는 수상한 여인(머플러 역)을 따라간 곳에서 아이의 비명소리를 듣고, 유괴범을 찾아낸다. 그 과정에서 그가 가둔 비밀의 서랍은 무슨 내용이었는지, 그가 무슨 일을 겪은 건지, 검은 그림자가 그에게 다가온다. 결국 그는 흰수염이 아닌 다른 사람을 잡게 되지만, 그는 흰수염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긴가민가 한 채로 끝이 난다. 이 부분은 시나리오와 살짝 다른데, 시나리오에서는 흰수염의 모습을 보고 그를 납치한 장면과 교차 진행돼 그가 유괴범이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반면, 영화에서는 여전히 친절한 사장으로서 행동하며 “잊어버려…”라고 작게 읊조리며 끝이 난다. 개인적으로 영화 버전을 더 선호한다. 확신할 수 없고, 여전히 징벌도 하지 못했지만 어찌 됐든 진혁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야 만. 어린 진혁도 흰수염의 극복할 수 없는 상처를 알았기에 비밀의 서랍을 닫아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 그 긴가민가함이 영화를 더 여운이 남도록 한다. 


그래서 흰수염과 진혁은 서로를 알아봤을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둘은 몇 마디 대화를 처음 나눈다. 오페라를 주문한 흰수염과 “어떤 리본을 달아드릴까요?”라고 친절하게 묻는 진혁. “그거 아세요? 사람은 가장 행복할 때 케이크를 찾는대요. 행복하신가 봐요.” 케잌을 전달한 뒤 왼쪽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가는 흰수염을 바라보는 진혁. 그리고 나오는 내레이션. “살아 있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상처와 잊고 싶은 기억의 연속일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확신하며 알아보지는 못했을 테지만, 어떤 직감이 그들 사이를 관통했던 것 같다. 그들이 함께한 시간, 나눴던 대화, 말투는 변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 마지막 장면에서 누구나 하나씩 가진 트라우마와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당신에게도 비밀 서랍이 있는지, 무엇을 넣어놓고 있는지. 


‘비밀이라는 것에도 무게가 있을까? 20년 넘게 털어놓지 못했던 말들을 날려버린 그날 이후 앤티크의 공기가 절반쯤 가벼워진 것 같았다.’


영화에서 가장 좋아했던 내레이션이다. 나에게도 비밀의 서랍이 있다. 열쇠는 나만 갖고 있지만, 앞으로 이 비밀의 서랍을 열어보고 싶을 때 달콤한 케잌을 떠올리고 싶다. 그러면 고통은 잠시 가벼워지고, 이 영화가 자연스레 떠오르겠지. 그리고 별 의미를 두지 않았던 케잌이라는 디저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 ‘가장 행복할 때 찾는 음식이 케잌’이라면, 나는 지금까지 케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동안 난 어떤 마음으로 케잌을 먹어왔을까? 케잌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겠단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 달콤한 디저트를 먹고 싶을 때 이 영화가 생각날 것 같다. 달달한 것이 당길 때 케잌 가게에서 케잌을 사게 되는 것처럼, 살아가다 달콤한 순간이 필요할 때 이 영화를 찾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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