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비에 르그랑
코로나가 한창 시작하던 때, 루마니아의 인쇄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코로나 바이러스 균의 모양을 확대한 것처럼 생긴 이미지는 자세히 보면 남자가 여성을 폭행하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가정폭력은 바이러스처럼 쉽고 빠르게 전염되고, 쉽게 해결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담았으리라 생각한다. 루마니아는 가정폭력 비율이 상당히 높은데, 통계에 따르면 여성들은 30초마다 한 명씩 가정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고 한다. 코로나에 대한 심각성을 역이용해 가정폭력 경고 광고를 제작했다는 것이 그 심각성을 잘 몰랐던 나에겐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자비에 르그랑 감독의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도 마찬가지다. 가정폭력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직접 체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심각성을 인지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영화로써 이러한 메시지를 던진다는 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이 쉽게 판단할 수도 없다. 영화는 판사와 변호사, 그리고 엄마 아빠가 벌이는 심리전으로 시작한다. 판사는 줄리앙(아들 역)의 글을 읽는다. 글에는 아빠에 대한 반감이 들어있다. 이러한 반감에 대해 변호사들이 각자의 변호인을 변호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관객들은 사건의 심각성을 보지 못한 이상 쉽게 단언할 수 없다.
이러한 심각성을 감독은 어떻게 표현해내고 있을까. 우리가 아주 흔히 보는 물건들에게서 그 심각성을 끌어낸다. 줄리앙이 앙투안(아버지 역)의 차에 탔을 때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출발하자 경고음이 났다. 그때, 줄리앙은 심하게 두려워한다. 안전벨트는 상징적이다. 안전벨트를 매는 행위는 자신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할 순 없지만 아빠가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경고음으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관객은 이 경고음이 계속될수록 무의식적으로 위험 신호를 받고, 자연스레 아빠를 두려워하게 된다.
이 영화가 특히 더 현실적이면서 무서웠던 점은 앙투안(아빠 역)의 부모는 지극히 다정하다는 것이다. 가정폭력은 그 부모의 대물림이 필수 요소가 아니라는 것. 앙투안을 혼내고, 줄리앙을 다정하게 대한다. “그러니 애들이 널 싫어하지”같은 말도 서슴지 않는다. 앙투안은 의처증이 심한 인물이다. 아내에게 집착하고, 법을 어긴다는 근거로 줄리앙을 협박해 살고 있는 곳까지 알아낸다. 특히 공영아파트단지에서 아이들을 봤다는 지인의 말에 화를 내며 어디 사냐고 부추기는 장면은 앙투안의 집착을 잘 드러낸다.
영화는 시종일관 별다른 액션과 기교 없이 가정 폭력의 단면들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현실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듯싶다. 그 감정이 가장 증폭되는 장면은 공영아파트단지에 산다는 것을 눈치챈 아빠가 줄리앙에게 어디 사는지 말하라고 했고, 줄리앙은 거짓말로 알려준다. 아빠는 데려다주겠다며 키를 빼앗고는, 줄리앙은 앙투안으로부터 전속력으로 뛰며 도망간다. 이 장면에서 도망이나 뜀박질이 아빠라는 대상에게서 가능한 일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앙투안은 아이들을 다시 봤다던 사람에게 전화해 기어코 집을 찾아낸다.
이 영화의 핵심은 마지막 장면이다. 옆집에 사는 부아디 아줌마가 누군가 집 문을 강제로 열 것 같다며 전화를 한다. 그리고 결국 이성을 잃은 앙투안은 소총으로 문을 쏘고, 미리암과 줄리앙은 경찰에 전화한 후 화장실로 피신한다. 경찰 덕분에 앙투안은 잡히고, 부아디 아줌마는 걱정되는 눈초리로 미리암을 바라본다. 옷을 입고 병원에 갈 채비를 마친 미리암은 부아디 아줌마의 시선을 느끼고 바라본다. 경찰은 시선을 의식한 뒤 문을 닫는다. 그리고 부아디 아줌마의 문도 닫히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장면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모두 부아디 아줌마의 시선으로 봤다는 점을 시사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일상과도 같은 가정 폭력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 특별한 액션을 취할 수가 없다. 슈퍼맨처럼 그들을 지킬 수도, 함부로 도와줄 수도 없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줄리앙이 느끼 것만큼이나 실제적이고 소름 돋는 공포를 겪다가도 영화가 끝나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점도 내포한다. 타인의 아픔과 공포는 우리에겐 거기서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름 돋도록 현실적인 영화다.
영화에는 그 흔한 노래도 없다. 조용히, 사람들의 말소리와 도시의 흔한 소음뿐이다. 그 점이 영화에 더 몰입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 듣는 소음 사이에서 누군가는 두려움에 떨며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매일 듣는 소음처럼, 가정 폭력이 누군가에겐 일상이라는 것. 노래가 없는 설정과 앙투안의 눈빛, 줄리앙의 불안, 미리암의 공포까지 영화가 끝나고 난 후에도 공포감을 갖게 하는 영화다. 자비에 르그랑 감독의 <모든 것을 잃기 전에>는 이 영화의 프리퀄이다. 등장인물, 가족의 상황, 아빠의 자동차 등 디테일적인 부분이 비슷할뿐더러 이 영화 이후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바로 재생돼도 어색하지 않다.
지독히 현실적이면서,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짙은 여운을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영화를 영화 그 자체로만 보게 하지 않고, 더 나아가 우리 삶의 연장선으로 보게 하는 것. 그것이 자비에 르그랑 감독의 이후가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