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디터 S Jan 17. 2021

위대한 만남에 대하여

이슬아, <깨끗한 존경> 

정확한 시기로 말하자면 작년이지만 올해 본격적으로 시작한 내 리추얼 중 하나는 출근할 땐 칼럼을 읽고 퇴근할 땐 e북을 읽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휴대폰을 보면서 지하철을 통해 출퇴근하는 내가 별도의 노력 없이 행할 수 있는 것들이다. 1월의 반이 지난 지금까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지켜왔다. 섣불리 말하기엔 쑥스러우나 이렇게 성공적(?)인 성과를 낸 이유는 아침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기 때문이고, 퇴근할 땐 새로 시작한 yes24 북클럽에 읽을 책이 많아서다. 


몇 년 전부터 인스타그램에 이슬아라는 글자가 많이 보였다. 주로 친구들이 올린 책을 통해 봤다. 강릉에 있는 작은 책방에 갔을 때도 두꺼운 이슬아의 책(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보고 "여기도 있네" 생각했다. 조금 읽었을 때는 그때 당시 수필이나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나로선 흥미가 당기지 않았다. 언젠가 나중에 좋아할 시기가 오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이슬아의 글은 정말 쉽다. 이 말은 문장이 겉보기에 간결하고, 쉽게 읽힌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해를 위한 노력이 필요 없고 읽는 순간 쉽게 읽히다 가슴에 무언가 남는다. 문장은 눈에 남아있고, 어떤 응어리 같은 것이 가슴에 쌓이는 느낌이다. <깨끗한 존경>은 이슬아가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를 담은 인터뷰집이다. 인터뷰. 특정한 목적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 


나의 경우 직업상 인터뷰가 주 업무다. 이야기를 들어야 쓸 수 있는 기사가 있다. 그래서 인터뷰이를 설정하고 우선 질문지부터 짠다. 어떤 메시지를 도출하도록 설계한 뒤 인터뷰에 임하는 것이다. 그렇게 뚜렷한 목적이 있던 나와는 달리 이슬아의 인터뷰는 특정한 목적이 없어 보였다. 그가 이 네 명의 사람을 어떤 목적을 갖고 만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특정한 사심 없이 컨택하고, 어떤 노력으로 이 사람들을 조사하지 않았다. 그는 이 사람들을 오래전부터 진심으로 좋아해 왔다. 이 사람들이 쓴 책을 읽고 생각하고 느끼고 공감하며 묻고 싶었던 질문들을 모조리 쏟아냈다. 


진심이 담긴 글을 사람들은 알아본다. 아주 쉬운 글이더라도, 형편없는 글이더라도 진심이 담겨있으면 관심을 받고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공유한다. 이슬아의 글은 대부분 그렇다. 그가 진심을 담아서 이들을 좋아했기에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책 제목 <깨끗한 존경>은 정말 잘 지어졌다. 그는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시선으로, 시각으로, 마음으로 이들을 바라본다. 그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인터뷰집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있는 자리에 내가 있다는 느낌이 들고, 이들의 말에 진심으로 나도 공감할 수 있게 됐으며, 이들이 말하는 목소리에 단 한 번이라도 용기 내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혜윤, 김한민, 유진목, 김원영 모두 너무 늦게 알아서 아쉬운 사람들이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책과 활동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싶다. 이 책은 읽는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이런 책을 쓸 수 있다는 건, 작가로서 얼마나 큰 축복일까. 




이슬아가 만난 사람들. 정혜윤, 김한민, 유진목, 김원영에 대한 이야기. (아래로는 필사한 것)


정혜윤 


정혜윤의 직업은 라디오 피디다. <CBS>에서 수많은 라디오 방송을 만들어왔다. 여러 권의 책을 쓴 저자이기도 하다. '사생활의 천재들', '침대와 책', '마술 라디오', '인생의 일요일들' 등 모두 보물 같은 책이다. 


정 : 그러니까 저는, 사람들이 슬프고 외로운 날에 기억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 나보다 더 슬픈 사람의 이야기요? 


정 : 내가 진짜 힘든 건 내가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정말 그를 이해하고 싶어도, 내가 그 사람은 아니잖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도 외로울 수 있어요. 유족들과 공감하고 헤어져봤자 우리의 저녁은 다를 거예요. 그게 그 사람에겐 슬픔이 돼요. 


정 : 저는 '다시'라는 단어가 그렇게 부드러워요. 다시 하고 싶어 하는 마음, 다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 실수를 만회하고 다시 용서받고 다시 힘을 얻고 다시 깨졌던 관계는 복원되고. 어쨌든 '다시'라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 이미 있는, 새로 출발하는 능력요. 


연대는, 온갖 고통을 겪어낸 사람이,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른 사람은 덜 겪도록 최대한 알려주는 것이더라고요. 


김한민 


완벽주의로 하려다가 포기해서 안 할 바에야, 가끔씩 실패하더라도 긴 텀을 두고 많은 동물을 살리는 게 더 중요해요. 


마음은 날마다 새로 태어나기도 하니까요.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많이 하나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어제의 나에 대해서도 계속 거짓말을 하죠. 


김한민은 책임감을 '반응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respnse + ability = responsibility인 거라고. 김한민 때문에 나는 이 단어를 잊을 수가 없다. 그 단어 때문에 "적어도 ~는 하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일이 늘어났다. 그것은 내게 최소한의 윤리가 되었다. 나 역시 그 최소한이 점점 커지는 방향으로 살고 싶다. 외면에는 더 둔해지고, 반응에는 더 민첩해지고 싶다. 


유진목 


산문과 칼럼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고 영화인이기도 하고 부산 영도에 자리한 '손목서가'의 주인이기도 한 그를. 


제가 서울 살 때 힘들었던 게, 주변에 사람들이 많은데 이 많은 사람들이 내게 아무 소용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그게 참 슬펐어요. 나중엔 제주도로 영도로 집을 옮기면서 물리적 거리가 멀어졌죠. 


사랑과 용기도 남았다. 사랑과 용기에 대해 묻지도 않았는데 거기에 분명히 있었다. 자신의 쓸쓸한 곳을 그것들로 채운 사람이 다녀갔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의 신이 되는 일에 대해 나는 자꾸 생각했다. 우리 각자에게는 아주 작은 전지전능함이 있다. 겨우 그것만 있거나, 무려 그것이 있다. 선생님이 소심한 전지전능이라고 말했던 그것. 


한 집에 있기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남의 좋음이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 혼자서도 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스스로의 보호자가 되는 것. 그러다 혼자가 아닌 사람이 되는 것.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망설임 없이 부르는 것. 노브라로 무대에 서는 것. 미래의 내 눈으로 지금의 나를 보는 것. 닮고 싶은 사람들의 모습을 따라 밥을 먹는 것. 사랑 속에서 아무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는 낮과 밤을 보내는 것. 기쁨과 슬픔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셔터를 내리는 것. 떠나는 것. 불행한 시간에 굴복하지 않는 것. 때로는 삶에 대해 입을 다물며 그저 계속 살아가는 것. 울다가 웃는 것. 


김원영


김 : 네. 전형적인 조형성이 주는 그런 아름다움이요. 걸그룹부터 김연아 선수까지 많은 사람들이 흔히 아름답다고 하는 신체가 있잖아요. 그것과 다른 아름다움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이었죠. 예전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냉소주의자였어요. 지금은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요. 그래도 저는 아직 그 감각을 잘 다듬지 못한 것 같아요. 연극을 한다는 건 제가 가지고 살아온 관점과 관념에 대한 도전이기도 한 것이지요. 장애인 무용 공연을 보러 가서 그들의 움직임으로부터 어떤 것을 발견하고 싶어서 애쓰기도 했어요. 


이 : 헬스장에 갈 때마다 어떤 전형성에 대한 갈망을 느껴요. 모두가 되려고 하는 몸 말이에요. 헬스장에서의 신체는 완성된 몸과 완성을 향한 과정에 있는 몸으로 나뉠 뿐이에요. 트레이너의 입장에서 제 몸은 늘 어디를 더 깎고 어디를 더 붙여야 하는, 덜 완성된 몸이죠. 덜 된 단계의 몸이요. 그런 시선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공적인 자리에서는 우리가 모두 동등하고 평등하고 같이 싸우자는 식으로 얘기하지만 쇼가 끝나고 집에 가면 전혀 다른 거죠. 조심스러운 이야기예요. 공적인 자리에서 토론하고 활동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늘 느꼈어요. 


김 : 저도 청소년기가 싫어요. 지금이 좋아요. 사람들 속마음은 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어느 정도의 합의가 있잖아요. 


_


우리는 이렇게나 시시각각 변하고 흔들린다. 여기 이 책에 고정된 만남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이 모습으로는 딱 한 번만 가능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