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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 S Dec 21. 2020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인아영 문학평론가의 평론을 인용했다 

소설 속 인물이 내 주위 사람인 것 같은 생각을 한다. 내가 읽은 대부분의 소설은 작가의 상상에서 비롯되는 문학이라 현실과 비교하기 어렵지만, 소름 끼치도록 현실적인 소설을 읽으면 가끔 등골이 서늘해지곤 한다. 내 주위에 있을 것 같은, 없다면 살아가다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말도 안 되는 직감일 뿐이지만 그 서늘함이 무섭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현실과의 싱크로율 100% 소설이다.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들, 한 명도 빠짐없이 실제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사람일 것만 같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이 밉다. 분명 미운데,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무식해서일까? 눈치가 없어서일까?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일의 기쁨과 슬픔은 현실에서 내가 정의 내릴 수 없던 '미움'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우선 "모르는 게 너무 많았"던 빛나 언니가 미웠다(<잘 살겠습니다>). 모르는 게 많아 염치도 없이 자꾸만 '나'에게 물어보는데, 감사함을 표할 방법도 모른다는 것. 그래서 주인공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르쳐주려 하지만 빛나 언니는 그마저도 그녀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나'의 의도를 잘못 파악해버린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는 연대의 계기가 됐다. "그때까지 언니가 회사에 있을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회사에 있을 수 있을까"라며 "부디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라고 끝맺는다. 누군가를 미워해 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내 성격답게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결국 그 사람을 미워할 수 없었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두 번째로는 "우리 사이에 특별한 기운이 흘렀던 것만은 확실했다"는 '나'가 미웠다(<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그는 "경험적으로 예쁜 여자는 지루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서른셋이므로 가장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줄 알았던" 남자였다. 그러나 지유 씨가 자신의 맘대로 넘어오지 않자 "세상 질척거리는 통화"를 마치고 욕도 읊조린다. 연애에 자신 있는 남자. 이렇게 하면 여자들이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사고방식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읽으면서도 진부한 그들 때문에 힘들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이런 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비슷한 경험을 겪은 사람들이 있으며, 구독하는 유튜버 중에서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종종 본다. 이미 익숙해져버린 이들을 온전히 미워할 수 있을까? 


세 번째로는 "은근한 반말과 아는 척"을 하는 아주머니가 미웠다(<도움의 손길>). "벌컥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내가, 아들만 셋인 사람이에요"라는 말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동시에 재생되는 경험도 했다. 그만큼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를 미워할 수 없었던 것은 "아들 내외가 오전 시간에 아이를 봐달라고 부탁했다"는 상황이 그랬다. 집을 청소하는 일을 하면서도 손주를 봐야 한다는 것만으로 감히 아주머니의 힘든 삶을 상상하게 되고, 동정하게 된다. 


'나'가 본 성경 속 구절이 이 소설에 들어간 것도 같은 이유 아니었을까.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나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 거지가 헌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아무래도 나는 '나'가 자신을 부자로, 아주머니를 거지로 인식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나이가 지긋한, 생전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내 집에서 내 살림살이들을 땀 흘리며 청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편치 않"은 사람이지만 그것이 진실된 양심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래서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과 함께 "주님 믿는 사람"이라는 아주머니를 미워할 수 없었다. 나라는 사람이 함부로 아주머니를 동정해선 안 될 것 같은 이유였다. 


반면 좋아했던 인물도 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케빈의 한숨 소리가 너무 신경 쓰여서 찰나의 순간만큼 짧게 운" '나'였다(<일의 기쁨과 슬픔>). 타인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미세한 변화를 느끼려고 하는 사람이어서 좋았다. '거북이 알'을 만나 진솔한 대화를 나눌 줄 아는 사람이어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표에게도 자신의 후배보다는 "제가 죽겠"다며 대표에게 케빈의 후임을 뽑으라는 말을 하고, '고독한 조성진' 채팅방에 고화질 사진을 바로 보내는 사람. 타인의 슬픔에 관심 갖는 게 힘든 일이라는 걸 알게 되는 요즘에 위로받았던 인물이었다. 


인아영 문학평론가의 "주는 만큼 돌려받는 곳. 딱 한 만큼의 대가를 치르는 곳.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에누리 없이 계산되는 곳"이라는 문장이 무서웠다. 그전까진 (부끄럽지만) 상식적으로 이해는 했지만 겪어보지는 않았던 자본주의 삶에 대해 이제 정확히 알게 됐기 때문이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벌게' 해달라는 말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그런 세상은 없다는 걸 알게 된 기분이다. 지독한 자본주의.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곳에서 미우면서도 현실적인 사람들을 만났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현실이 무서운 것은 왜일까. 현실이 그만큼 무섭다는 것이겠지. 일의 기쁨과 슬픔은 그런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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