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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 S Dec 14. 2020

처절한 실패를 좋아하세요

정대건 장편소설, GV빌런 고태경


‘살면서 가장 오래 좋아한 건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 지원했던 대외활동이었다. 스크린 속 여성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고, 여성이 주가 되는 영화를 많이 알 수 있어 좋았다. 생각보다 많은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그 시간 동안 친해진 사람들 덕분에 행복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대외활동이 끝나고 적은 글이었다. 내가 살아온 인생 중 가장 오래, 강렬하게 좋아한 건 영화였다. 그래서 지원할 때 마지막 대외활동이라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분야를 하자며 다짐했다. 막연한 상상이었지만 언젠가 이루고 싶은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에 한 발 다가갈 수도 있겠구나- 그 생각만으로 벅차던 순간이 있었다. 행복했다.


영화제에는 나랑 비슷한, 혹은 나보다 훨씬 영화를 좋아하고 꿈꾸는 친구들이 많았다. 영화감독부터 배우, 평론가 등 영화와 관련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 말이다. 하루에 5편이나 되는 영화를 놓치지 않겠다고 뛰어다니며 관람하고, 영화제에 오는 (나는 이름도 모르는) 영화인들과 사진을 찍으려 줄을 섰다. 이 친구들을 보며 나는 저들보다 영화를 덜 좋아하므로 영화인이 될만한 자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대외활동이 끝나고 나는 영화 쪽으로 진로를 알아보지 않았다. 어쩌면 나보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며 느낀 일종의 패배감, 또는 재능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이유일 것이다. 나도 승호처럼 사랑하는 것을 미워하게 될까 두려워 지레 겁먹었던 것 같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영화 쪽으로 진로를 알아보지 않은 건 (재능 관련해) 잘한 선택이었고, 영화에 대한 글 이전에 글 쓰는 능력을 향상해야 한다는 자기 피드백이 이성적이었다는 판단을 내려본다.


GV빌런 고태경은 철저히 실패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조혜나를 중심으로 그녀가 겪어온 실패의 경험들로 모자라 주위 사람들이 그녀에게 뱉은 실패의 문장들로 구성돼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고, 나도 겪었거나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 같아서 찔리면서 봤다. 마치 '프로듀스 101'을 보면서 가희가 한 연습생에게 “그런 마음으로 내일모레는 할 수 있겠어? 3일 후에는? 일주일이 돼도? 1년을 줘도 할 수 있겠니?”라며 티비를 보던 시청자들에게 당장 티비를 끄고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은 일종의 팩트 폭행을 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서른 살이 됐을 때의 나를 상상해본다. 아마 많은 실패를 겪고 난 후일 것이다. 그때 이 책을 다시 보고 싶다. 그때의 난 이 책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취업준비생 시절 도서관에 갈 때마다 나도 작가와 같은 생각을 했다. 누군 공무원이라는 꿈을, 영화감독, 작가, 선생님, 다른 무언가가 되기 위해 매일 도서관에서 오래 공부에 몰두해 있겠지. 하지만 난 그런 사람들처럼 뭔가를 이루기 위해 몇 년 동안 노력한 적이 없었다. 열정을 갖고 열렬히 좋아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혜나가 부러웠다. 그리고 영화를 접고 유튜브로 전향한 윤미에게 감정이입했다. 나는 아마 윤미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일찌감치 현실을 깨닫고 현재를 택한 선택 말이다.


세상엔 여러 명언이 있다. 그중 ‘한번 떠난 버스는 돌아오지 않는다’와 ‘기차는 언젠가 다시 돌아온다’ 같은 뉘앙스의 명언이 생각난다. 어떤 명언은 이미 떠나간 것에 대한 말이고 어떤 명언은 이미 떠나갔지만 새로운 기회가 온다는 의미다. 나는 명언이야말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선택해야 한다고 본다. 어떤 명언을 믿느냐에 따라서 마음가짐과 행동이 바뀔 수 있으니까. 기회가 이미 떠났다고 믿는 사람과 다시 온다고 믿는 사람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실패와 성공은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도 있겠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억울할 수도 있는 말이겠지만,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꼭 무언가를 이루려는 마음 없이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다 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겠지. 사랑하는 것들을 잘 못한다고 해서 미워할 필요가 없다. 못하면 못하는 대로 사랑하는 것이니까. 사랑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듯. 작가 자신이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인 것처럼, 나도 이 소설을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다. 사랑하는 것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필사


나는 앞으로도 실수하고 후회하고 반복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미워하지는 않을 거다.


모든 준비생들과 지망생들, 기회만 주어진다면 잘 해낼 사람들이지만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소설을 썼다. 그건 나에게 누군가 해주었으면 하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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