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라 에스키벨,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원제는 Como agua para chocolate으로, ‘초콜릿을 끓이기 위한 물’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심리 상태나 상황을 말한다고 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 초콜릿을 끓이기 위해서는 뜨거운 냄비에 바로 넣으면 안 된다. 우선 뜨거운 물을 끓이고, 그 위에 볼이나 그릇을 올린 다음에 녹여야 한다. 사실 초콜릿은 중탕에 녹이는 것이 올바른 조리법인데, 펄펄 끓는 상태가 제목이라니. 그만큼 뜨거운 상태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일까.
원제를 단어 하나하나 파고들었던 이유는 사실 책을 읽고 나서 한국어 제목이 와닿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원제에서는 초콜릿의 ‘맛’보다는 ‘끓는 상태’를 더 담은 느낌이라면, 한국어 제목은 ‘맛’에 집중했다. 쌉싸름한 맛을 느끼긴 했지만, 그게 이 소설의 주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소설을 읽고 나서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김동인의 <광염 소나타>를 읽고 나서와 비슷했다. 두 개의 소설에서 모두 엄청난 불꽃이 이는 장면을 생생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티타와 페드로가 ‘끓어올랐던’ 강렬한 순간에 더 집중하게 됐고, 그 장면에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다.
소설의 키워드로 ‘성냥’이나 ‘요리’, ‘엄마’를 꼽을 수 있었는데, 그 무엇보다 ‘사랑’에 집중하게 된 소설이었다.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성냥이 다 타버릴 정도로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나 하고 스스로를 돌아봤다. 나는 오히려 성냥에 불이 붙지 않길 기도하면서 연애를 했던 사람이었다. 사랑에 내 전부를 투자하고 싶지 않았던 방어적인 성격이었고, 항상 언젠가는 헤어질 것을 전제로 사랑을 시작했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내 사랑의 끝맺음이 아름답지 않았고, 오히려 자존감이 무척이나 낮아진 계기가 됐는데, 모두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는 것을 티타를 보며 깨달았다.
티타의 삶을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나, 내가 과연 티타를 불쌍히 여겨도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처음엔티타가 정말 불쌍했다. 막내딸로서 엄마를 평생 돌봐야 한다는 거지같은 가문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못 하고, 억압받으면서 살아야 했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티타는 함부로 측은해해서는 안될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법사 같은 사람이었다. 페드로와 존의 사랑을 동시에 받으면서 마법 같은 음식을 만들고, 어딜 가나 사랑받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태어나면 티타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삶에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그것을 거스르는 것도 운명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거스르는 것을 주체적인 행동이라 치환한다면, 우리는 모두 우리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예요! 원하는 대로 자기 삶을 살 권리를 가진 인간이란 말이에요.”라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마 엘레나의 영혼이 사라진 부분이 정말 좋았다.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하는 마음이 정해진 운명을 이겼다는 메시지 같아서. 집안일만 하던 티타, 사랑하는 사람을 형부로서 바라봐야만 했던 티타가 존을 사랑했지만 에스페란사와 알렉스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불꽃을 위해 페드로를 선택하고, 마마 엘레나에게 뚜렷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음을.
그 무엇보다 자신의 불꽃이었던 요리와 사랑에 진심을 다한 티타가 부럽다. 언젠가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싶다. 마법 같은 요리, 그리고 그것과 가장 비슷한 감정은 사랑. 황홀감을 느끼고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