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아비정전>
"4월 16일 오후 3시, 당신은 나와 함께 했어. 당신 덕분에 난 그 1분을 기억할 거야. 너와 나는 1분을 같이 했어, 나는 이 1분을 지울 수도 없어. 그건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으니까."
잘생겼는데 성격은 나쁜 남자 vs 못생겼는데 다정한 남자. 희대의 밸런스 게임이다. <아비정전>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아비는 전자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평범할 수밖에 없는 1분을 평생토록 잊지 못하게 만든 나쁜 남자, 아비.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왜 그가 그런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한 내막을 모르는 장만옥(수리진 역)의 입장에서는 그저 나쁜 놈일 뿐이다.
아비정전은 '아비의 일대기'를 뜻하는 직관적인 이름답게, 아비가 어떤 인물인지 파헤쳐 나간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해가는 과정 중에서 장만옥에게 잊지 못할 1분을 선사한 것은 왕가위 감독의 천재적인 연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잊지 못할 1분을 선사한 것과 별개로, 그는 이유도 모른 채 차갑게 식어버리기에.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아비는 스스로를 발 없는 새로 지칭한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스스로를 지칭하는 데에는 그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욕구가 담겨 있다. 그의 진짜 엄마를 찾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데, 그렇게 그는 진짜 엄마를 찾아 필리핀으로 떠난다. 그리고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진짜 엄마를 등지고, 걸어간다. 다시는 엄마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과 함께. 그리고 술에 취해 길거리를 헤매다 유덕화가 구해주고, 이내 조직원에게 칼에 찔려 죽는다. 평생을 발 없는 새처럼 방황하다 결국은 죽는 것으로 아비의 삶은 마무리된다.
마지막 장면에는 양조위가 등장하지만, 흥행 저조로 2편을 찍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아쉽게 들렸다. 왕가위 영화 중에서 나름 나쁘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왜 2편을 찍지 않았을까.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도, 내면은 시종일관 공허했던 장국영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는데 말이다. 형용할 수 없는 공허한 감정을 영화와 같은 콘텐츠에서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를 꺼내볼 것 같다.